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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BRUNHILD 01 : 용을 죽인 브륀힐드 ㅣ BRUNHILD : 용을 죽인 브륀힐드 1
아가리자키 유이코 지음, 아오아소 그림, 이승원 옮김 / 노블엔진 / 2024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어느 섬에 용(龍)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용은 섬에 떠내려온 여자아이를 줍습니다. 용은 그 아이를 친딸처럼 길렀습니다. 딸이 16세가 되던 날, 섬을 노리고 인간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용은 분전했지만 과학이 발달한 세계에서 뒤떨어진 판타지 세계의 존재인 용은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용은 마지막 숨이 다할 때 딸에게 인간을 원망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용이 지키는 섬은 인간들에게 전설의 섬이라 불리는 [에덴], 보물이 가득한 섬. 먹으면 지혜를 올려주는 신비한 열매가 있는 섬. 무궁무진한 에너지가 산재한 섬. 하지만 무시무시한 용(龍)이 수호신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인류는 몇 번이나 전멸을 하면서도 끈질기게 공략에 나섭니다. 그도 그럴게 그 섬에는 달콤한 열매가 있으니까요. 그리기를 수십 번이나 되풀이 하면서 인류는 과학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찾아냈습니다. 전설의 드래곤 슬레이어를. 과학과 드래곤 슬레이어 조합은 무시무시했던 용의 존재를 지워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용을 죽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마치 식민지 쟁탈전을 치르는 것처럼 인류는 경쟁적으로 산재해 있는 용의 섬을 찾아 떠나죠. 인류는 그런 그들을 칭송합니다.
소녀는 친딸처럼 길려주었던 용의 죽음을 눈앞에서 허무하게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아빠(용)를 따라 소녀도 결사항전에 나서지만 과학과 드래곤 슬레이어 앞에서는 한낱 어린애에 불과합니다. 숨이 끊어진 아비(용)에게서 흘러나온 피를 마시며 소녀의 가슴에는 오로지 하나의 감정만 자리 잡게 되죠. '복수'. 소녀는 군인들에게 거둬져 인간들의 세계로 나옵니다. 사람들은 늑대에게 길러진 아이가 돌아왔다며 동물원의 동물을 보듯이 하죠.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늑대에게서 구해 주었으니 은혜를 느끼겠지? 여기서 작가는 발상의 전환을 가미합니다. 늑대에게 길러진 아이는 늑대를 죽인 인간을 증오한다는 것을. 그러나 소녀에겐 복수할 만한 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소녀는 인간 세계에 순응하는 척을 합니다. 언젠가 숨겨진 발톱을 꺼내 휘두를 것이라고 자신의, 지금의 감정을 죽이고 착한 아이처럼 지내며 뒤로는 만반의 준비를 해갑니다. 소녀의 착한 겉모습에 인간들은 열광합니다. 가십을 찾아, 흥미를 찾아 동물원의 동물을 보는 것처럼. 소녀는 시간을 들여 복수의 칼날을 갈아갑니다. 그동안 마음에 든 인간도 만납니다. 어릴 적 헤어졌던 친족도 만납니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 누굴 만나든 가슴속에 자리 잡은 복수의 불꽃은 꺼질 기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 복수 대상자가....
사실 용은 딸이 복수라는 어두운 감정을 가지는 걸 우려했죠. 자신은 곧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고, 당하기 전에 딸을 인간의 세상에 돌려보내려 했지만 딸이 용을 이성적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용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됩니다. 결국 소녀도 인간이었고, 신(神)의 계열에 있는 용하고는 사고방식의 차이로 서로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는걸. 여기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가지만 좀 난해해서 두루뭉술하게 표현 못 하는 게 아쉽군요. 아무튼 용은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사후 세계에서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여기엔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현실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딸에게도 그것을 전하며 착하게 살기를 바라죠. 하지만 딸은 복수심에 빠지게 되고, 죽은 용은 사후 세계에서 껍질을 벗어던지고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딸아 바랐던 사랑도 사후 세계에서라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용과 같이 살며 용의 지혜를 습득하며 인간 그 이상으로 진화한 생물이 될까 했던 소녀의 이야기는 결국 용의 우려대로 굉장히 슬프게 흘러갑니다. 용과 인간의 사고방식이라는 차이를 소녀를 통해 담담히 풀어내는 게 인상적입니.
맺으며: 제일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소녀가 어릴 적 섬에 흘러들었을 때 용이 잡은 고래를 훔쳐 먹는 장면을 들 수가 있습니다. 용을 겁내면서도 못 먹게 하면 어쩌지 하며 전전긍긍해 하는. 빼빼 마르고 황달끼가 있었던 소녀가 용의 보살핌으로 건강해지고 섬의 동물들과 친하게 지내는 짧은 시간은 에덴의 동산을 연상케 하죠.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식민지 개척의 시대를 보는 듯했군요. 용의 섬(에덴)은 황금의 땅(신대륙)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고, 차지하면 온갖 자원은 내 것이 되는,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그것(용의 섬 에덴)으로 인류는 발전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착취 당하는 자(이 작품에서는 용)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했습니다. 여주인공은 그런 식민지 출신으로서 침탈 당하여 가족(용)이 죽자 복수에 나서는 원주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복수의 끝에 뭐가 있는지 밝히려 하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수를 한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올까? 같은 입바른 이야기가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피해자가 수긍할 수 있는 결말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메시지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진짜로 던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해서 엔딩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좀 특이한 케이스가 아닐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옴니버스식으로 1권에서 끝이 납니다. 단권으로 끝나는 건 아니고 2권은 다른 이야기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