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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향신료 23 - Extreme Novel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아야쿠라 쥬우 그림, 박소영 옮김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24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로렌스와 호로는 딸과 사위를 찾아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었습니다만.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던 건, 사위는 여명의 추기경이라는 이명을 얻어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고, 딸은 성녀라는 이명을 얻었다는 뉴스였군요. 그 말괄량이가 성녀라니 기가 막히죠. 산 만한 곰을 막대기 하나로 조련하고, 온 산을 헤집고 다니며 말썽만 부리던 딸이 말입니다. 로렌스와 호로는 그 흔적을 찾아 어느 물류 거점 도시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사위의 활약을 듣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성서를 받아 들었을 때는 부모로서(어린 콜을 맡아 키웠으니)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기쁨도 잠시, 로렌스에겐 그 뒤치다꺼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청빈한 삶을 바라고 교회 개혁까지는 좋은데 그로 인해 돈맥경화가 생겨 어느 성직자를 도와야 하는 상황에서 도울 수 없는 사태가 생겨 버렸죠.
이 세상에 부패한 성직자도 있는 반면에 사람들을 위해 분골쇄신하는 성직자도 있다는걸, 그를 안타까워했던 마을 사람들이 정식 주교로 성품(聖品)을 추진 중이었습니다만. 마을 사람들을 도와 그 성직자 뒤를 캐면 캘수록 돈과 성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걸까 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죠. 그는 어릴 적 살았던 마을이 붕괴되면서 홀로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거든요. 이는 호로의 과거와 일맥 상통하는 게 있습니다. 수백 년이나 풍작을 관장하며 마을의 안녕을 보살펴 왔더니 이제 너는 필요 없다고 쫓겨났으니까요. 그 성직자도 그런 불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닐까 하는, 그래서 로렌스는 방향을 바꿔 그의 불안을 없애려 하죠.
두 번째 이야기는 로렌스와 호로의 이야기입니다. 이전 리뷰에서도 숱하게 언급 해온 게 있는데, 호로는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이고, 로렌스는 한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죠. 세월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로렌스에게도 흔적을 새기기 시작합니다. 호로와 결혼할 때 각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는 걸 인정했고, 웃으면서 헤어지자고 다짐도 했지만 세월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어떤 심정이 될까. 나이 먹기 싫다고 몸부림치기보다 남겨지는 사람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로렌스는 자기가 떠나도 지난날의 추억은 남아 있다는 것을 물질적으로 남기려 합니다. 그래서 약간의 무모해 보이는 관세 문제에 뛰어들게 되죠. 그동안의 사태를 해결해온 능력을 인정한 교회가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영주 자리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거는 것에 빨대를 꼽아 자기 의도대로 흘러가게 하는 등, 잔머리를 엄청 굴려 댑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호로의 마음은 편치만은 않죠. 사실 그는 자기를 만나지 않았다면 대상인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로렌스의 발을 붙잡은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 영주 자리에 낚여 또 사기당하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 하는 마음이 겹쳐저 시종일관 전전긍긍하는 게 포인트입니다. 지혜를 빌려줘도 되겠건만, 이번에는 의욕을 내비치며 혼자 해결하려는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갑니다. 뭐 사실 온종일 술만 퍼마시고 있어서 그다지 조신하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요. 아무튼 멋지게 관세 문제를 풀어내고, 그 몫으로 함께 했던 과거의 추억까지 눈앞에 다시 재현 시키면서 호로의 감동을 이끌어 내는 게 또 다른 포인트입니다. 하지만 넓게 보면 이별을 대비하여 남겨진 자가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사전 작업이라는 것에서 한편으로는 쓸쓸함을 자아내게 하죠. 로렌스가 받았던 몫은 영주의 지리가 아니라 보리였으니까요.
그 외의 이야기를 들라면 22권에서 나왔던 다람쥐의 화신 타냐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철광산 개발로 인해 민둥산이 되어 버린 산을 오랜 기간 동안 나무(주로 도토리)를 심어 푸르게 만들었으며, 그때 잠시 들렸던 스승님(인간으로 추정)을 잊지 못해 하염없이 기다렸다는 것에서 안타깝게 했죠. 산의 처분 문제로 들린 로렌스와 호로에게 도토리 빵을 내밀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여주었던 그녀가 이번 23권에서도 등장합니다. 호로만큼이나 오래 살았으면서 인간관계는 서투른, 호로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도 호로에게 동생 취급 당하고, 약간의 백치미로 인해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지 신(神)의 종복이라 자처하며 신앙심이 깊었던 엘사의 마음을 녹이기도 했었죠. 교회 입장에서 보면 타냐도 이단인데도 신경 안 쓰는 걸 넘어 종막에는 집에 초대까지 하는 장면은 희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타냐도 오랫동안 홀로 지내오며 외로움을 견뎌온 것이죠. 로렌스와 호로의 꽁냥을 보며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하는 엘사에게서 그녀야말로 진정한 성직자가 아닐까 했군요. 참고로 엘사는 로렌스와 호로가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서 그녀의 고향에서 일어났던 밀가루 사태를 그들이 해결해 준 인연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제가 되어 콜과 뮤리가 저질러 놓은 개혁의 여파로 각 마을 교회에 불려 다니며 일거리를 도와주고 있는데요. 원리원칙 시어머니 같은 성격이라 칠칠치 못한 호로와는 상극이죠. 이번에도 온종일 술만 퍼마시는 호로에게 잔소리를 해대다 꽁냥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느꼈는지 다 때려치우고 타냐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버립니다. 그녀도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군요. 서로를 감싸주고 보다듬어 주고 서로 다른 시간이 흘러도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로렌스와 호로를 보며 가족이란 무엇인지 새삼 깨닫는 것도 이번 23권의 포인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