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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의 팔라딘 3 - 상 - 철녹산의 왕
야나기노 카나타 지음, 린 쿠스사가 그림, 신우섭 옮김 / 데이즈엔터(주)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주인공이 지구인이고, 부모가 언데드라는 것을 제외하면 정통 판타지 왕도물과 유사한 흐름을 보입니다. 세상에 마왕이 출현했고, 시작의 마을에서 어느 소년이 길을 떠나 동료들을 만나 모험을 하며 용사로 거듭나고 끝끝내 마왕을 무찌르고 세상을 구한다. 그의 많은 무용담은 음유시인의 노래로 세상으로 뻗어 나가고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칭송한다. 본 작품도 기본 골자는 이렇습니다. 다만 마왕에 붙잡힌 공주는 없는 듯하고(3권 下편 혹은 4권에서 나올 가능성은 있음), 로도스도 전기처럼 빼어난 미모의 엘프녀 또한 없습니다. 있는 거라곤 쉰내 나는 남정네들밖에 없습니다. 네, 이 작품에서 히로인이라고 불릴만한 여자 캐릭터는 나오지 않습니다. 많이 양보해서 음유시인 '로비나' 정도겠지만 그녀는 대륙을 방랑할 뿐 주인공과는 같이 다니지 않습니다.
그래서 히로인이 엮인 희로애락 같은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는 없으며, 대신에 사나이의 우정 같은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 있죠. 특히 2권에서 만난 하프엘프 '메넬(참고로 남자)'과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주인공 사후(수명이 다하여) 그의 자손을 지켜보고 그의 무덤을 지키겠다는 메넬의 대사들은 브로맨스로서 어째선지 남녀 사이보다 더 애틋한 마음을 들게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늑향의 로렌스와 호로의 관계를 보는 듯했군요. 그래서 안타깝고 아쉬웠던 장면입니다. 메넬이 여자 캐릭터였다면 늑향 다음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감성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3권 下편 혹은 4권에서 또 다른 하프엘프를 출연 시키려나 본데, 이번에도 남자 캐릭터면 작가의 성향을 좀 의심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3권 上편은 1권으로부터 2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주인공은 그동안 메넬과 함께 마물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하고 마을을 개척하면서 그 지역 왕(정확히는 왕족)에게서 팔라딘이라는 직함을 하사받고 개척한 마을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변방에 점점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으고, 이민자들도 모여들면서 마을은 성장을 거듭하죠. 그러나 필연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면 먹을 것과 주거환경 그리고 일자리는 필수이기에 이것들을 해결하느라 주인공은 동분서주합니다. 이세계 전생물이라는 설정답게 편의주의에 입각해 신문물을 퍼트릴 만도 하겠지만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게 그런 건 일절 없다는 것입니다. 여느 양판소와는 다른 철저하게 이세계 지식만으로 마을을 꾸려 가는 게 특징이죠.
그렇다고 심시티처럼 도시 건설이 주된 이야기는 아니고요. 어디까지나 본 작품은 마왕을 무찌르는 이야기로써, 본 작품에서 마왕은 '데몬'입니다. 그 옛날 대륙에 존재하는 지적 생명체(인간, 엘프, 드워프 등)들을 절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혔던 데몬의 군세가 또다시 준동하여 대륙을 절망에 물들이려 하고 있죠. 이에 주인공은 동료들을 모아 데몬들을 무찔러 간다는 이야기인데 이 과정을 풀어놓는 작가의 유려한 필력은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그래서 칙칙하고 쉰내 나는 남자들로만 구성된 파티라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게 됩니다. 필자의 필력이 똥이라서 작가의 필력을 표현할 길이 없군요. 브로맨스로 접근하면 늑향 느낌이 나고, 고대 신들의 시대라든지 신앙 등 모험담으로는 19금을 뺀 고블린 슬레이어 느낌이 납니다. 그러고 보면 데몬 = 고블린 느낌도 있는...
이번 3권 上편에서는 마을 건설 외에도 데몬에게 박살 난 드워프의 고향을 되찾고 거기에 잠들어 있는 용(龍)을 무찌르러 간다는 이야기 시작점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데몬들이 상대라면 주인공은 절대 지지 않을 만큼 성장은 하였으나 신화 속에 존재한다는 용(서양식으로는 드래곤)이 상대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주인공을 비호하는 신(神) 조차 싸우지 말라며 말릴 정도로 극악무도한 용을 상대로 주인공은 맞서려 하죠. 어쩌면 데몬보다도 더욱 힘겨운 싸움이 될지 모르는,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고뇌할 수밖에 없고,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 또한 가집니다. 하지만 절망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주인공은 결국 결심을 굳힙니다. 그런 주인공의 용사적인 모습에 동료들이 모이고 길을 떠나는 장면들은 정통 판타지가 가지는 흥분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었군요.
맺으며: 이 작품이 흥미로운 건 신(神)들의 싸움과 그에 파생된 이야기들 가령 엘프와 드워프 등 탄생 비화라든지 이런 설정들을 세세하게 적어놓음으로써 뭔가 몽환적인 느낌을 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그런 세계에서 영웅으로 자리 잡아간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죠. 이세계 전생물이면서 그에 따른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것도 점수를 높게 줄만 합니다. 언데드 부모로부터 보다 인간다운 행동이 무엇인지 배웠고, 그 가르침에 따라 차별과 구별을 하지 않음으로써 만인들로 사랑을 받아 가는, 하나의 신앙(혹은 전설)이 탄생하는 과정을 그리는 듯한? 물론 이런 이타적인 행동들이 어느 정도 노골적으로 비치기도 한다는 게 옥에 티이긴 합니다. 가령 일본인은 이렇게 상냥하다 같은? 필자의 마음이 삐뚤어져서 그렇게 느껴젔을 수도 있겠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