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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을 먹는 비스코 5 - L Novel
코부쿠보 신지 지음, 아카기시 K 그림, 이경인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22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대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주의
"28일 후"라는 영화에 보면 사람들이 갇혀서 생체실험을 당하고 있던 침팬지를 구하려다 침팬지에 물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 딴에는 불쌍한 침팬지를 구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영국 전역을 궤멸 시켜버리고 말죠. 이렇듯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결과는 항상 좋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 뒷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에서는 전부 좀비가 되어 버려 죄에 따른 벌을 받고 자시고 할 게 없었습니다만. 이번 5권에서 위의 상황을 빗대어 보자면, 주인공 '비스코'는 인체실험을 당하고 있던 침팬지 격인 '베니비시'를 구한 인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베니비시'는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인조인간이고, 그러해서 인간은 '베니비시'에게 무슨 짓을 해도 처벌을 받지 않을뿐더러 '베니비시'는 인간을 공격하지 못하였죠. 그러던 것이 주인공 '비스코'의 등장은 '베니비시'의 가슴에 '용기'를 심어주게 됩니다.
주인공은 4권에서 '베니비시'들이 감옥에 갇혀 있고, 감옥장(관리소장)에 의해 전원 처형된다는 걸 알게 되자 그들을 구하기로 마음먹었었죠. 못생겼다는 이유로 잡혀가 옥살이할 판이었던 주인공은 안 그래도 감옥에 심사가 뒤틀려 있었는데, 기골이 있어 보이는 '시시(베니비시, 히로인)'에게서 갇혀있는 아버지를 구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베니비시'들의 처우(끔찍한 학대)도 알게 되자 세상 정의를 외치며 가는 곳마다 악당을 무찔렀던 주인공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고, 감옥장에게서 베니비시들이 풀려나면 세상 인간들은 멸망할 거라는 경고를 들었음에도 주인공은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여 기어이 '베니비시'들을 해방하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에게 학대받던 노예를 해방한 영웅이라 할 수 있죠. 그러나 감옥장의 경고대로 '시시(히로인)'는 주인공을 만나 용기를 얻어 현(現) 베니비시의 왕이었던 아버지를 참살하고 새로운 베니비시의 왕이라 칭하며 베니비시들끼리 대동단결하여 인간들을 몰살한다고 선언해버립니다.
이번 5권은 맛이 가버린 '시시(히로인)'와 동조하는 베니비시들이 일본 전국의 인간들을 세뇌하여 지배하에 두겠다며 '대해수 홋카이도(아귀처럼 생김)'의 힘을 흡수하려는 걸 주인공 '비스코'와 그의 동료 '미로'가 막아선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손으로 베니비시를 풀어준,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워야 하죠. 그런데 주인공은 '시시'가 걸은 저주 때문에 꼬꼬마가 되어 버렸고, '시시'는 대해수 홋카이도의 힘을 흡수하면서 엄청나게 강해지는 바람에 제대로 대응을 못 하게 되어 버립니다. 똥 치우러 왔더니 똥차가 전복돼서 온 천지에 똥으로 칠갑이 된 상태라고 할까요. 대해수 홋카이도 내부를 종횡무진하며 사태 해결에 쫓기게 되고, 그 와중에 '책임회피의 제왕 챠이카'라는 꼬마 소녀를 구하면서 인디아나 존스도 찍고... 챠이카 왈: "아버지에게 데려다줘!"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인데? 이제 뭐가 뭔지 모를 인체 대탐험도 하는 등 이 작품이 원래 이런 작품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을 연출해댑니다.
요컨대 이겁니다. 가련한 히로인(시시)인줄 알고 구했더니 최종 보스라는 시추에이션요. 학대반던 로봇 혹은 침팬지의 반란이 시작된다고 할까요. 그러나 자신들을 학대하던 인간들만 죽이지 인간들은 다 똑같아라는 정신으로 무장하고 핵폭탄 같은 꽃가루로 전부 세뇌하고 말테다하며 으르렁거리는 '시시'는 '대해수 홋카이도(진짜 훗카이도만 함)'의 힘을 흡수해 자신의 힘인 동백꽃을 만발 시켜 가면서 사태는 일촉즉발로 넘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 비스코와 미로는 엄청나게 굴러다니죠. 그러다 둘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지고, 주인공 비스코는 대해수 홋카이도 힘까지 받으며 이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신(神)의 영역까지 들어서는 등 용기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정신론과는 다른 용기를 제일 우선으로 하는 열혈이라는 것에서 많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장면들이 펼쳐지는데요. 이대로만 가준다면 분명 천원 돌파 그랜나간 급의 희대의 작품이 나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더랬습니다.
맺으며: 근데 왜 그러셨어요? 아니 조종 당해서 악당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정을 꼭 넣으셔야 했나요. 100보 양보해서 조종 당하고 있었다 칩시다. 그럼 그러한 복선이라도 좀 넣어주던가요. 복선 하나 없이 갑자기 자아가 생긴 내면의 어쩌구가 연약하고 가련한 히로인을 꼬드겨서 악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악당이 된 히로인을 퇴치하는 것에서 선회하여 구해준다. 졸지에 가해자에서 피해자가 되어버리네요? 무슨 말이냐면, 당연히 '시시(히로인)'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시시'의 복수는 정당한 것으로 인간들은 할 말이 없던 상황이었죠. 그러나 이 작품은 사랑과 용기를 테마로 하고 있어서 용기는 주인공의 몫이고 사랑은 히로인들의 몫이라는 것마냥 히로인들은 사랑으로 감싸줘야 된다는 자다가 이블 킥 할 거 같은, 히로인의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던 작가의 만행으로 사실은 '시시'는 조종 당하고 있었다는 설정을 중간쯤에 급하게 넣어 놓는 바람에 분위기 다 망쳐버립니다.
그래서 '시시'에게 내면이 속삭이는 장면이 나왔을 때 설마설마했어요. 설마 작가가 클리셰에도 들어가지 않는, 개도 안 물어간다는 설정을 쓸까? 독자를 우롱해도 유분수지. '시시'를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만들기 -> 공격자에서 피구호자로 만들기 -> 피구호자가 되자마자 세상 연약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시추에이션. 사랑과 용기로 안 되는 건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려 했나 모르겠습니다만, 그동안 필자의 찬사를 한순간에 다 말아 먹어 버리더군요. 아니면 하다못해 내면이 본격 부상해서 '시시'를 조종할 때 거대 마왕 같은 포부와 위엄이라도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온 천지에 꽃을 피우겠다는 둥 너희는 모판이라는 둥 하는 말마다 세상 찌질한 모습은 또 뭔가 싶어요. 왜이리 허망한 마음만 들까... 그나마 남에게 미루기 장인 '챠이카'와 2권에서 등장했던 그로테스크 '암리' 그리고 4권에서는 안 나왔던 사이비 상인 '티롤'이 보여주는 떠들썩함이 그나마 위안이었군요. 어려져버린 주인공 비스코와 원래 어린 챠이카를 돌보느라 등골 휘는 '미로'로 볼만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