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요즘 구입할 것도 없고, 재고(읽을거리)도 바닥을 보이고 있어서 별생각 없이 구입한 작품입니다. 알아보니까 일본에서는 21권이 나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3권 이후 소식이 없군요. 그 이유를 찾아보려고 열심히 읽어 봤습니다. 일단 내용은 이세계 전이를 다루고 있고요. 주인공은 학교 옥상에서 밥 먹으려다 소환 당하고, 도착한 곳은 중세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세계였습니다. 보통 이런 소환이 이뤄지면 으레 나오는 말이 용사여 마왕이 어쩌고저쩌고, 이 세계가 위기이니 뭐니 지들이 알아서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주인공 보고 열정페이를 하라고 등 떠미는 세계가 정석이잖아요. 근데 그런 건 식상했는지 마왕은 애초에 없었고, 사람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명언을 탄생 시키려는지 소환한 주체는 주인공을 노예로 만들어 전쟁에 써먹을 생각 만땅이지 않겠습니까. 하필 소환된 세계는 일본으로 치면 전국시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국가 간 전쟁을 밥 먹듯이 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세계 전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용사가 되어 이세계를 구하는 것이 아닌, 도망자가 되어 전란에 휩싸이고 궁극적으로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개고생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수물 하고는 조금 다른, 소환 주체가 추격해오면 잡아 족치고, 전장에서 만나면 싸우고 뭐 그런 이야기 같더라고요.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매일 아침마다 진검으로 승부하는 실전 무술을 전수받았고, 주인공 덩치는 드웨인 존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우람하여 일단 기본적인 패시브는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환 직후 노예 목걸이를 걸려던 영감과 일단의 기사 무리들을 쉽게 제압해버리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죠. 그런데 여기서 주인공은 탈출한답시고 너무 철두철미하게 일처리를 하는 바람에 영감과 기사들을 몰살했다는 것이고, 영감은 나라에서 굴지의 영향력을 가진 정치가이자 마법사였다는 것에서 주인공은 졸지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1권은 성(城)에서 탈출 후 이웃나라로 국경 넘기 직전까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안타까웠던 건 라노벨계 이세계 물 역사가 상당히 길 텐데도 왜 같은 이야기들을 넣어 놨을까 입니다. 그러니까 이세계 물정을 알아보고, 길드에 가서 모험가로 등록하고, 모험가로 활동하기 위해 여러 물품을 구매하는 틀에 박힌 이야기들이 상당수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현대 일본과 비교해서 위생문제 등을 언급했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거라 생각이 들었군요. 그나마 차별을 두려는지 현실의 은행 시스템을 적용해서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신선했습니다. 다른 좋은 점으로는 길드 마스터와 안면을 튼다든지 실력 보자며 뒷마당에 가서 결투한다든지 길드 여직원과 눈 맞는다든지 이런 건 없어서 좋았는데요. 이세계에 신문물을 퍼트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건 주인공 몫이 아니군요. 소환은 꾸준히 이어져 그중에 누군가가 이세계에 신문물을 퍼트리고는 있나 봅니다.
그리고 약간 비평해 보자면요. 주인공은 자기가 살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긴 하지만, 무의미한 살생을 이어간다고 할까요. 갑자기 이세계에 소환 당하고 대뜸 노예가 되어 죽을 때까지 전장에 나가 싸우라고 하면 누구라도 화낼 테죠. 그러니 주인공이라고 화내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그 죄를 물을 거면 소환 주체인 당사자들만 없애면 되지, 탈출하려고 큰 상처를 입은 것처럼 연극 중인 주인공을 걱정해 주는 선량한 병사와 의사까지 죽이는 건 너무하지 않나 싶더라고요. 물론 얼굴이 알려져 탈출할 때 특정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는 개연성을 심었지만 어차피 국경도 봉쇄되었고, 추격자가 엄청 많이 붙은 시점에서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였거든요. 거기다 얼굴 알려지는 걸 꺼린 주제에 마을 옷 가게에 들어가 옷을 구매하는 건 또 뭔가 싶더군요. 성에서 탈출할 때 병사의 옷을 빼앗아 변장했고, 변장한 채로 마을에서 옷 가게에 들러 옷을 사 가면 특정되는 건 시간문제인데 이걸 간과하나? 근데 추격자는 이걸 간과함.
모험가로 첫발을 내디디며 열심히 의뢰 수행 중에 노예 자매 둘을 구해서 수하로 두는데, 이것도 좀 개연성이 부족했군요. 하필 주인공이 가는 길에 노예꾼 마차가 있었고 하필 도적떼가 노예 자매를 겁탈하려 하고 그걸 주인공이 구해주고 구해주니까 주인님 코스, 거기에 구해준 은혜도 모른 채 오만하고 거만한 노예꾼 돼지는 하늘나라로 보내주는 건 덤이고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런 클리셰적인 이야기를 넣으니까 라노벨의 인식이 안 좋지 않아 싶더군요. 물론 작가는 운명의 만남 같은 이야기를 쓸려고 했겠죠. 은연중에 그런 이야기도 있고요. 뭐 사실 이 작품이 연재되었던 시기를 생각해 보면, 이 작품도 사실 이세계 전이의 물계에서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긴 합니다. 다만 국내 정발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식상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고요.
맺으며: 아무튼 1권을 읽으면서 왜 3권에서 정발이 끝났을까 하는 걸 찾아봤는데 결국 발매 시기가 늦어 그렇지 않나 싶었습니다. 내용은 정석적이고 클리셰적인 이세계 전이 +@로 주인공 먼치킨(이건 어릴 때부터 수련 해왔다는 개연성이 충분했지만)은 이제 식상하거든요. 그렇다면 차별점을 두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 차별점은 주인공은 도망자 신세라는 것과 머리가 상당히 비상하다는 것이 있습니다. 실제로 전투와 전술면에서 꽤 그럴싸한 모습을 보이죠. 근데 할아버지에게서 실전 무술은 배웠지만 전술은 언제 배웠데? 같은 개연성 부족이 생기고, 어떻게 보면 참 희한한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그 외에는 문화적 관점이 있군요. 현실에서 어떤 나라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대립이 생기듯, 이 작품에서 주인공을 소환해서 노예로 부리려는 것 또한 풍습에 지나지 않다는 것, 그래서 그 풍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인공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호 존중이 없는 이런 설정은 선과 악을 명확히 해서 흥미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