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환상의 그림갈 16 - 이별의 이유조차 우리는 알지 못한 채로, NT Novel
주몬지 아오 지음, 이형진 옮김, 시라이 에이리 그림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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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왕 연합에 함락된 오르타나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군과 하루히로 일행은 결사의 사투 끝에 탈환에 성공한다. 사실 원정군이 죽든 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버림말로 이곳으로 보내졌고, 이들을 이끄는 장군 또한 그런 점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부하들은 직속을 빼곤 오합지졸 그 이상을 보여주는 놈팽이들 밖에 없는, 가지고 있어봐야 문제만 일으키는 놈들 밖에 없으니 왕국으로서는 오르타나를 탈환하면 그것으로 족하고, 이 과정에서 이들이 죽는다면 쓰레기를 치우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하루히로 팀이 함락된 오르타나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황야를 우왕좌왕하다가 이들(원정군)의 눈에 띈 것에서 운이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꿈도 희망도 없기로 유명하다. 보통은 시간이 지나면 볕이라도 드는데 이 작품은 볕 드는 구멍마저 막아 버린다.


이번 에피소드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어쩌면?을 들 수가 있다. 하루히로의 스승은 전쟁통 속에서 만난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조언과 가르침을 선사해주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듯이 꽃이 피면 언젠가 지는 것도 자연의 섭리다. 하루히로의 스승이라고 무적은 아니다. 스승의 죽음은 하루히로의 마음에 어떤 파장을 불러왔을까. 기억을 잃지 않았고 좀 더 강했다면 잘해나갈 수 있었을까? 그래서 어쩌면 스승은 죽음을 가장해 하루히로를 성장시키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하지만 이런 흐름도 좋겠는데 작가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늘 그래왔듯이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고 살아 있는 사람은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그리기 시작한다. 죽음이란 늘 도처에 깔려 있었다. 친한 사람도, 친하지 않는 사람도... 거기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다.


이번 이야기는 오합지졸로 오르타나 탈환에 성공한 원정군을 이끄는 장군의 반란을 그리고 있다. 어차피 왕국에서 버려지다시피 했는데 변경에서 내가 왕이 된들 누가 탓하겠냐다. 문제는 여기에 하루히로 팀이 엮이게 된다는 거다. 원정군에게 붙잡히듯 보호받을 때부터 장군을 신뢰하지 않아 놓고 탈환 후 일찌감치 도망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놈의 우유부단함이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만다. 이용 가능한 건 뭐든지 이용하려는 장군의 손아귀에 붙잡혀 하루히로는 그의 수족이 되어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원래는 원정군과 의용병은 그런 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하루히로는 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인질'​이 잡혀 버렸으니까. 이 작품은 은근히 19금적인 요소를 깔고 있다. 이번 하루히로 팀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야 여성진이 3명이나 있고, 이번 원정군은 사회의 쓰레기들만 모여 있으니까. 


장군은 고블린과 동맹을 맺고 싶어 한다. 나라를 건국하고자 할 때 제일 중요한 게 주변의 정세와 안정이다. 그래서 장군은 인간에게 위협적인 고블린과 손을 잡으려 한다. 이 얼마나 얼빠진 일인가 싶다. 하지만 무역 도시 '베레'의 경우를 보더라도 마물과 인간은 공존이 가능하다. 문제는 하루히로 팀이 없는 곳에서 해줬으면 하는 거고, 흐름은 하루히로 팀을 놔줄 생각이 없다. 인질이 잡혀버린 하루히로 팀은 원정군을 절대 믿지 못함에도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보통은 이 시점에서 주인공 버프를 받아 인질을 구출하고, 장군에게 한방 먹이는 카타르시스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장은 했다고 해도 하루히로 팀의 본질은 '찌끄레기'다. 먼지가 합쳐진다고 더스트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래도 발버둥은 처봐야 되지 않겠나 싶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거린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지렁이는 지렁이일 뿐이다.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루히로는 유메와 란타를 만난다. 기억이 온존했다면 아무리 똥 덩어리 란타라도 반가웠을 것이다. 비참함이란 무얼까. 자신만 살자고 도망간 란타는 여행 중에 내면적 성장을 이뤘다. 유메는 몇 개월(아니 1년인가) 뒤에 만나자는 약속을 이제야 이뤘다. 하지만 눈물 나는 상봉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 옛날 오르타나에서 같이 생활했던 기억은 이미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 지 오래다. 그래도 하루히로에겐 천군만마를 얻은 거나 다름없다. 유메와 란타는 기억을 잃지 않았고, 실력적으로 성장을 이뤘으니 많은 도움이 되리라. 장군의 싸움 실력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설익은 감이 홍시를 흉내 낸다고 팔릴 리가 없듯이 성장을 이뤘다고 풋내 나는 찌끄레기들이 어디 가겠나 싶다. 하루히로는 인질을 구출해 도망 가려는 계획은 잡는다. 그게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 모른 채.


어쨌거나 작가 후기를 보면 최종장에 들어섰다고 언급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제법 급진전을 보인다. 입만 열었다 하면 깐족거림으로 사람 미치게 만드는 히요무가 본격적으로 출연하고, 열리지 않는 탑(1권에서 하루히로등 아이들이 처음으로 나왔던 곳)의 주인이 등장하면서 이 작품 최대의 미스터리 기억 소실의 전말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결국은 하루히로 팀은 이리저리 이용당하는 것뿐이라는 참으로 비참함을 보여준다는 거다. 하루히로는 감으로 어느 정도 좋아 대충 때려 맞춰 가면서 이 시국을 타파하고 싶지만 힘이 없다. 이들에게 힘을 보태줘야 할 살아남은 의용병들도 이들 편이 아니다. 세상에서 고립되어 하루히로는 인질을 구출하고 안정된 삶을 얻을 수 있을까. 지렁이는 있는 힘껏 머리를 휘둘러 본다. 그러나 더욱 세게 밟힐 뿐이다.


맺으며: 작가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나 보다.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절망만이 존재하는 이야기를 쓰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인질이 잡혔을 때 결국 살아서 돌오긴 힘들 것이라는 암울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흘러간다. 하지만 어쩌면 인질을 잡힐 수밖에 없겠다는 그동안의 흐름도 없잖아 있었다. 기억이 소실되면서 감정도 리셋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이전에 내가 누굴 좋아했는지도 까먹게 된다.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길을 모색하는 하루히로를 보다 보면 이성으로서 연심을 키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스포일러 때문에 인질이 누구인지 밝힐 순 없지만 아마 다음 에피소드는 대립이 아닐까 싶다. 결국 이 말은 이번 에피스도에서 기승전결은 없다는 거다. 그래서 이번 에피소드는 많이 불편하게 만든다고 할까. 120여 페이지를 고블린과의 동맹을 위해 쓸데없이 지출하고, 그나마 의미가 있다면 모르겠는데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누가 찌끄레기 아니랄까 봐 선택에 있어서 소심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목은 짜증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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