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블린 슬레이어 11 - L Books
카규 쿠모 지음, 칸나츠키 노보루 그림, 박경용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9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날, 동굴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나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는 무얼까. 겨우 어른으로 성장하여 첫 모험을 떠난 날, 가볍게 들뜬 마음으로 들어간 동굴에서 나만 살아온 사실은 주박이 되어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 옥죄어 온다. 정확히는 무도가 소녀도 살았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된 소녀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자신은 계속 모험가 일을 하는 현실. 여신관을 보고 있으면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 여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녀가 한번 발을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나날 속에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나아가기만 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지키고, 치유하고, 구하라.' 지모신의 교리를 충실히 수행하려는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모험가의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일까. 그날,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구해진 이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모험가로써 경력을 쌓은 그녀는 어엿한 중견 모험가로 성장 하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선 어떤 것을 해야 할까요. '자만하지 않는다. 성실히 임한다.' 자, 여신관의 주위에 온통 은등급뿐이죠. 작중엔 별로 표현은 안 되어 있지만, 그렇다면 신입 등 생각이 꼬인 사람들이 그녀의 위치를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는 일목 묘연해집니다. '은등급이 떨어트리는 고물을 주어먹을 뿐 니가 하는 게 뭐가 있냐고.' 하지만 그녀(여신관)의 승급이 결정됩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모험가 중 높은 등급을 가진 사람 중에 소위 말하는 양아치가 없다는 게 특징인데요. 제대로 올바른 정신이 박혀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그렇다는 건 여신관의 평가도 제대로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녀(여신관)의 노력의 결과. 그날, 동굴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그녀는 비록 도움을 받았을지언정 자기 발로 분명히 걷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여신관에게 여상인이 찾아옵니다. 언제였더라. 5권 때였군요. 가끔 편지를 주고 받기도하는 여상인의 정체는, 판타지이긴 한데 중세 시대를 표방하는 이 세계에서 귀족가의 딸로 태어나 부족함이 없는 삶에 뭔 불만이 있었는지 모험가를 하겠다며 집안 대대로 전해져오는 가보(검)을 들고 뛰쳐 나왔다가 고블린에게 된통 당해버렸던 영애 검사인데요. 한때 좌절하여 집에 틀어박히나 싶었는데 어느새 일어서서 상인을 하고 있었군요. 처음부터 이쪽 계통으로 나갔으면 대성을 하였을 텐데라는 느낌으로 어용상인(왕궁에 직납하는 상인)까지 꿰차선 승승장구 중이랄까요. 그러나 왕과 검의 처녀(지고신의 대주교, 금등급, 세계를 구한 영웅)까지 그녀(여상인)를 각별히 여길 만큼 성공한 인생이라지만, 그 한 번의 잘못으로 여상인은 여신관보다 더 어리면서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여신관과 여상인, 그리고 둘의 공통점은 고블린 슬레이어. 시작은 같았어도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에게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설친다며 어리석다고 비난도, 쓸데없는 다정함도 없는 그에게서 그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 갔었습니다. 만약 여신관이 좀 더 일찍 고블린 슬레이어를 만났더라면 미래는 바뀌었을까. 처음 파티 그대로 조금식 성장하는 나날, 고블린 슬레이어와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신들이 굴리는 주사위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는 게 여신관에게 있어서 행운일까 불행일까. 그리고 여상인에게도. 이번 이야기는 어쩌면 신들이 굴리는 주사위의 결과가 다르게 나왔다면, 어쩌면 여상인도 고블린 슬레이어 파티에 끼여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구성입니다.
여상인이 가져온 의뢰. 동쪽 국경을 넘은 어떤 나라에서 고블린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며 조사를 명 받았는데 이들에게 호위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길을 떠나는 고블린 슬레이어 파티, 사방 세계로. 그동안 다크 계열을 표방하였다면 이번 이야기는 어딘가 몽한적인 느낌을 선사하는데요. 필자의 감성이 말라 버려서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종적이 대거 출연하고, 사막을 건너면서 신기루를 보는 듯한. 신화를 노래하고 그 신화를 따라 발자취를 남기는, 그동안 고블린은 몰살이라며 눈에 뵈는 게 없이 나댔다면 이번엔 모험이란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파스텔풍 여행길을 보여주고 있군요. 특히 여신관과 여상인이 보여주는 우애 깊은 자매 같은 모습은 흐뭇하게 합니다. 같은 선상에서 출발할 때 보다 빨리 여상인도 고블린 슬레이어를 만났다면 미래는 바뀌었을까 싶을 정도로...
맺으며, 입만 열었다 하면 고블린 고블린 거리는 고블린 성애자 비중이 줄어 버렸습니다. 대신에 여전히 여신관의 압도적인 성녀 포스는 대단했는데요. 보기에도 끔찍한 고블린들이 흘린 오물 속에서 신음하는 여자들을 일일이 챙겨주고 보다듬어주는 모습은 참으로 눈물겨웠군요. 그날,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여상인을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모습 또한 애절하게 합니다. 노력한다. 자만하지 않는다. 성실히 임한다. 그리고 구한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죠. 여신관이 딱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는데요. 승급했다고, 살아 돌아왔다고 우쭐해하지 않고 언제나 최선을 다할 때 주변의 평가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진리. 그리고 경험이야말로 최고의 밑천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며 착실히 성장해가는 여신관이 참으로 눈부시다 할 수 있었습니다. 여상인 또한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실천하면서 성장이란 이런 건가 싶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