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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공작으로 전생했으니까, 이번엔 너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 3 - Novel Engine
아이다 리즈무 지음, nauribon 그림, 박경용 옮김 / 데이즈엔터(주) / 2019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숲에서 주운 여자애를 지켜주고 맺어지고 싶다는 일렴 하에 금수저를 넘어 다이아 수저 몇 개나 보장받은 미래를 걷어차 버리고 흙수저의 길을 걸었던 소년의 말로. 귀족인 자신과 평민인 그녀, 우리가 맺어지는 건 까마귀와 까치가 맺어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세계에서 나는 어떤 결단을 내려가야 할까. 소년의 대답은 '그렇다면 내가 평민이 되어 주지.', 결론: 망했어요. 송충이는 솔잎만 먹고살아야 하고,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세상 진리를 대놓고 거부했던 소년에게 남겨진 것은 혐오의 시선과 그토록 좋아했던 여자애는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결말만이 남았어요. 원래 이러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 집에서 평민이 되도록 곱게 놓아주지 않자 세상 온통 소문 날 정도로 망나니 짓을 좀 한 게 뭐가 대수라고, 사실은 어둠의 세계에서 좋은 일도 많이 했단 말입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냐고요. 아마 소년은 몸져 누웠다가 그대로 세상을 하직한 게 아닐까요.
결과 현실의 주인공(이름 안 나옴)이 그의 몸에 빙의한 것이고요. 이세계는 [슈야 마리오넷]이라는 애니메이션 속, 애니메이션의 진짜 주인공은 나름대로 핸섬가이 슈야. 그런 세계에서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오크와 헷갈릴 정도의 돼지 몸뚱아리면 참 서글플 겁니다. 거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혐오의 시선을 받는다면요. 이세계에서 나의 평가는 어떨까. 집안을 걷어 차고, 약혼녀도 걷어차고, 귀양살이 하라고 들인 학교에서조차 망나니 짓으로 나의 평가는 있는지 모를 정도로 최하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자, 소년에게 빙의한 주인공(이하 데닝)은 이제부터 무얼 해야 할까. 그에게 남은 것은 숲에서 주은 여자애 '샬롯'만이 있습니다. 아직 다른 남자에게 가기 1년 전의 현재, 지금까지의 오명을 벗고 평가를 올려 소년의 꿈이었던 여자애 샬롯과 맺어지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얼까. 뭘 하긴요. 죽도록 뛰는 수밖에요. 원래 처음부터 그런 놈이 아니었으니 다시 제정신을 차렸다는 걸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망국의 공주 '샬롯', 대규모 마물의 공격으로 나라가 망해버린 비운의 나라에서 어떻게 도망쳐 나왔지만 노예 상인에게 붙잡혀 오늘내일하던 것을 데닝(소년)이 구해줬습니다. 이후 데닝은 그녀의 정체를 숨기며 자신의 종자로 만들어 지내길 10여 년, 바람의 대정령의 가호를 받고 있음에도, 빛의 마법에 뛰어난 소질이 있음에도 빛의 정령에게 무시당해 마법을 못 쓰는 비운의 히로인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도 불철주야 마법을 쓰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소용이 없어요. 공작가(家)의 3남의 종자로 발탁되어 그에 맞는 실력을 보여줘야 함에도 그러지 못해 월급은 자꾸만 깎이고 궁핍한 삶 끝에 급기야 학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되는 처지라면 이보다 불쌍한 히로인이 있을까요. 그런 그녀의 환경을 개선해줘야 될 데닝은 좋아한다면서 바라만 보고 있으니. 어쨌거나 그런 이들에게 이번 3권은 터닝 포인트입니다. 내(데닝)가 얼마나 너(샬롯)을 좋아하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근데 길이 험하다. 다리스(데닝이 사는 나라)의 차기 여왕이 될 왕녀 '카리나(표지)'의 등장, 전편에서 데닝을 사자 우리에 집어넣고도 영웅 탄생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했던 그녀가 마법 학원으로 찾아옵니다. 그러곤 데닝에게 시종을 맡으라고 하는데, 잊었수? 당신 덕분에 자신감 과잉 민폐 왕녀 '알리시아'는 두 번째 납치를 당해서 죽을뻔하였는데 말이죠. 자칫 옆 나라와 전면전 일어날 수 있었는데 돈으로 입 싸악 닫게 하다니 수완이 장난 아니구려. 근데 여긴 뭐 하러? 학원 근처에 던전이 생겼는데 탐색 좀 같이 하잡니다. 이 작품은 세상 온통 민폐만 끼치는 사람 밖에 안 나와요. 겉으로는 사근사근, 본모습은 방구석 폐인, 권력구도라든지 귀족 간 알력이라든지 차기 여왕이 될 사람이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이 데닝가(家)와 앙숙인 추기경이 주최하는 가디언 시험이라는 사자 우리에 데닝을 처박는 것도 그렇고, 이건 뭐 칼만 안 들었지 저승사자가 따로 없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왕녀인데,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데닝가(家)라도 왕녀를 홀대할 수는 없죠. 말은 교류라지만 학원에 뭐 하러 왔는지도 모를 방구석 폐인 기질의 왕녀를 어르고 달래고 하는 사이에 우정은 싹트고 이런 사람 처음이야를 되뇌며 데닝만 바라보는 왕녀의 눈빛이란. 왕녀가 품고 있는 진짜 마음, 애초에 어디서부터 그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마법 학원에 온 것도 던전 탐색은 구실일 뿐 그가 보고 싶어 달려왔다는 걸 조금만 읽어봐도 알겠던데,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그를 마음에 들었는지 하는 개연성이 없어서 그저 하렘 만들기 일환인지. 거유가 보고 싶었던 작가의 소망이 글로 나타난 것인지. 권력 싸움 따위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파란만 잔뜩 불러다 놓고 난 갈게. 이렇게 써놓고 보니 왕녀를 매도하는 거 같은데 사실은 '마음 터놓고 마주할 사람이 없어 외로움을 타는 왕녀'라는 게 그녀의 본질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서 혐오를 받는 데닝에게서 동질감을 느낀 것인지...
아무튼 다시 샬롯으로 넘어가서, 이대로 지내다간 정말로 월급을 못 받게 되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습니다. 국내 굴지의 대귀족 데닝가의 종자 주제에 마법 하나 제대로 못 쓴다는 게 말이 되나. 데닝이 어거지로 그녀를 종자로 만들지 않았다면 더 비참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그렇기에 인정을 받기 위한 그녀의 몸부림은 처절 하디시피 합니다. 전편에서 도적들과의 전투를 힘 하나 못 쓴 주제에 발에 걸려 넘어진 도적이 쥐고 있던 지팡이를 날름 주워서 내 전리품이라고 하니 그녀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비참하고 뒤가 없는지 알 수 있죠. 사실 그녀는 마법을 못 쓰는 게 아니라 쓰면 안 돼요. 정령에게 무시당하는 이유가 다 있는데, 요리를 시키면서 레시피를 줬는데도 완성품은 지옥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듯한 음식이 그녀의 마법이란 말이죠. 그걸 알고 있기에 데닝은 말리지만 뒤가 없는 샬롯 입장에서는 강경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발암적인 강경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발버둥이라는 것에서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죠.
자, 그런 나날을 보내는 이들에게 다가오는 크나큰 존재. 이들에게 터닝 포인트가 될 존재, '검은 드래곤'의 등장, 지금은 멸망해버린 샬롯의 나라를 지켜주었던 수호신의 등장으로 어째서인지 샬롯은 대위기를 맞아갑니다. 단언컨대 여기서부터가 이 작품의 진짜배기라 할 수 있어요. 좋아하는 여자를 지킨다는 것,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살아온 남자가 위기에 처한 여자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세상 모두를 놀라게 하며 감히 우러러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드래곤을 상대로 주인공이 보여주는 힘은. 다르게 표현하면 중2병이라고도 하는데 뭐 이건 넘어가고요. 왕녀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음에도 세상에 순응하듯 데닝의 종자가 되어, 살아가기 위해 식당에서 허드렛 일을 하고, 인정받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하고, 그렇지만 드래곤에게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나서는 강심장, 자신감 과잉의 어느 민폐 왕녀와는 다르게 용기를 부여잡고 일어서는 히로인이란.
맺으며, 이 작품보다 개성이 강한 캐릭터가 또 있을까요. '넌 요리하면 안 돼'라고 주위에서 뜯어말리는데 자신은 자신의 실력에 전혀 의문을 느끼지 않는 캐릭터(샬롯), 자신감 과잉으로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다가 된통 당하는 캐릭터(알리시아), 방구석 폐인에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똥을 마구 흩뿌리는 캐릭터(카리나), 하나도 아니고 만나는 캐릭터마다 너는 내가 지킨다라며 플래그 팍팍 세워가는 난봉꾼(데닝), [슈야 마리오넷]에서 진짜 주인공이어야 할 '슈야'는 왕녀 카리나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이런 것들이 모여서 보여주는 인간군상극은 정말 눈물을 쏘옥 빼놓을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2권에서 자신감 과잉 왕녀 때문에 혈압 올랐던 게 말끔히 해소되는 에피소드랄까요. 드래곤에 맞서는 데닝에게서는 닭살이 돋지만 소년물 치고는 괜찮은 연출이 아니었나 합니다. 뿅가지 않을 히로인은 없을 정도의 연출.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