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사는 기도하지 않아 1 - Extreme Novel
스도 렌 지음, 니리츠 그림, 정혜원 옮김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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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아가면서 참 알다가 모를게 인연인 거 같아요. 어제까지만 해도 이 사람과 인연으로 맺어질까 같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게 분명한 하루를 지나 오늘 찾아온 낯선 사람과의 인연, 이 사람은 나에게 있어서 무엇일까. 이 사람과 무엇을 하고, 어떤 대화를 하고 앞으로 어떻게 지낼까 하는 두려움과 기대 그리고... 이 작품은 170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영국 하면 떠오르는 건 잿빛 하늘, 이 작품의 이야기도 잿빛으로 물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노예제도가 남아 있는 시절, 그리고 도박이 횡행하는 시절에서 주인공 라자루스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도박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요.

 

그에겐 3가지 철칙이 있어요. '이기지 않는다', '지지 않는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슬럼가에서 자란 라자루스는 도박사 양아버지에게 주워져 그도 도박사로 성장하였습니다. 양아버지에게서 도박 기술 외에 물려받은 3가지 철칙, 모난 돌이 정 맞고 튀어나온 못이 망치를 맞는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는 도박에서 눈에 띄게 이기지 않고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으니 지지 않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더랬죠. 그러던 어느 날철칙 중 하나가 깨어집니다. 무심결에 대박을 터트리는 바람에 졸지에 템즈강 바닥에 처박힐 신세가 되어 버린 그는 도박에 이겨 받은 돈에 버금가는 무언가를 받기로 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는데요.

 

그리고 다음날 그의 집에 찾아온 의문의 남자와 이국에서 온 듯한 소녀 하나, 하루하루를 도박으로 연명하던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면 여기가 아닐까 했습니다. 어제 도박장에서 딴 돈에 버금가는 무언가를 사버린 그에게 배달된 노예 소녀 '릴라' 원래 고위 귀족에게 배달되어야 할 그녀가 여기에 온 까닭은 무얼까. 철저하게 귀족의 취향에 맞도록 개조된 그녀에게선 기계를 연상시킬 만큼 무기질적으로 다가옵니다. 명령하기 전에는 그 자리에서 이끼가 펴도 움직이지 않는 그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라자루스는 '아무래도 좋아'를 뱉어낼 뿐입니다. 첫 만남은 최악, 그러나 이것이 인연으로 이어질지는 지금은 몰랐겠죠.

 

그녀는 말을 못합니다. 글을 못 씁니다.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요. 그런 그녀가 인생을 도박으로 탕진하는 그와 어울릴 거란 물과 기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언제든지 찾아오기 마련이죠. 의사소통이 안 되어 글을 가르치고, 겨울을 나기 위해 옷을 사주고, 있을 곳을 마련해주고, 뭣보다 괴로운 일을 시키지 않는다. 남들이 보기엔 그녀는 수동적이라 할 수 있어요. 명령 이외엔 그 무엇도, 앉으란 말을 하지 않았다고 몇 시간이고 서 있었던 그녀. 라자루스의 동작 하나하나에 움찔움찔. 그녀가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어 왔을지 쉽게 상상이 되고도 남았습니다.

 

그러나 한번 내린 눈은 언젠가 녹기 마련입니다. 중앙아시아에서 영국까지 잡혀와 귀족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개조당한 그녀가 간직했던 차가운 마음, 그녀의 마음은 라자루스의 의미 없는 행동 하나에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듯 점차 그녀가 간직했던 눈은 조금식 녹아 가요. 글을 배우고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서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아가죠. 투덜 거리면서도 월급(작중에선 주급)을 주고 옷을 사주고 동물원도 데려가 주는 등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활에서 그녀는 조금식 마음을 열어 가죠. 이게 참 극적인데요. 처음엔 농담도 통하지 않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의문을 표시하는 등 꽤 귀엽게 발전해가는 게 이 작품의 최대 포인트가 아닐까 합니다.

 

필자가 이렇게 장황하게 그녀에 대해 늘어놓는 건 주인공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도박의 세계에서 그녀는 그가 살아야 될 이정표로 작용해가죠. 처음엔 없는 사람 취급하다가, 그야 그렇잖아요. 도박에서 이겼지만 죽지 않기 위해 뭔가를 샀을 뿐인데 배달된 게 그녀이거든요. 사람과의 얄팍한 인연 밖에 없던 그에게 갑자기 자신의 테두리 안에 뭔가가 들어왔으니 대처할 수 있을 리 없죠. 하지만 괜히 나이 먹은 게 아니라는 듯 그녀에게 이거저거 도박이라던가 사회에서도 조금식 알려주기 시작해요. 그쯤 그녀는 글자로 의사소통하며 꾸준히 쫓아가려 노력도 하죠.

 

그동안 도박밖에 몰랐던 그, 그녀의 출현으로 이거저거 사람들과의 인연을 늘여 가게 되죠. 그래서 그녀가 다시 도박장에 회수되었을 때 그가 보여준 행동은 그녀가 얼마나 한 사람의 인연에 깊게 개입하게 되었고 그러인해 잿빛뿐이던 사람의 마음에 얼마만큼의 컬러를 선사했는지, 참 극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처절 하디시피 그녀를 돌려받기 위해 일생일대의 도박에 나서는 그, 그리고 그녀를 되찾았을 때의 감동은 말이 없더라도 충분히 전해질만큼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필력이 좋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차가움뿐이었던 마음을 밀어내고 자리 잡은 그 사람의 온기,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그에게선 목숨을 걸 가치가 있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맺으며, 뭐랄까. 기본적으로 도박에 대해 많이 나오지만 인간관계를 풀어내는 부분에서는 참 센티멘털하게 하더군요. 특히 릴라가 귀족의 취향에 맞춰 개조되는 부분은 이 작품이 얼마나 잿빛투성이인지 여실히 보여주지 않았나 합니다. 그래서 절대영도를 자랑하는 얼음과 누구도 들이지 않을 거 같은 어둠이 만나 조금식 변화를 보이며 양지로 올라서는, 서로 공통된 아픔이 없더라도 상처를 보다듬어 주며 서로의 온기를 찾아가는 장면은 이 작품의 묘미가 아닐까 했습니다. 그동안 금상이니 대상이니 무슨 상을 받았다는 작품치고 제대로 된 작품을 못 봤는데 이 작품만은 예외로 인정할만했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필력이 좋아요. 표현력이랄까요. '바꿀 수 없는 신념이란 뾰족한 금속과도 같아 사람을 상처 입힌다(비슷할 겁니다.)'라든지 도박사 지인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던 주인공에게 다가가던 릴라를 사신으로 표현한 부분에선 소름이 돋았군요. 필자는 그것보다 사실 릴라가 변해가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다들 기피하는 얼음공주가 자신의 본모습을 봐주는 사람들과 인연을 쌓으며 조금식 녹여가는 마음을 표현하는 작품은 찾아보면 많을 겁니다. 이 작품도 그런 계열이긴 해요. 뭐 본질은 도박이지만요. 그래도 필자는 인연에 더 무게를 두고 봤습니다. 참, 3가지 철칙 중 하나는 직접 보시라고 언급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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