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꽃(사진). 무릇은 물기가 많은 땅 위라는 뜻의 물웃에서 유래됐다고. 구근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달인 것이었을까, 쟁여놓았던 것이었을까? 흐물흐물 씹히던 무릇. 생각해보니, 이름 값에 어울리는 간식거리였네 그려.


 ‘강한 자제력 혹은 인내라는 꽃말을 갖고 있단다. 그런데 꽃 이름 무릇을 대하면 물웃보다는 발어사 무릇[]’이 먼저 떠오른다. 근엄한 말을 하기 전에 양념격으로 하는 그 무릇말이다. “무릇, 사람이라면... ” ‘인내라는 꽃말은 이 꽃의 생태적 특성보다 혹 유사 발음의 이 발어사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런지? 하여 무릇이라고 부를 때에는 물웃이란 본뜻에 발어사로서의 무릇이란 의미도 은연중 곁들여 사용한 것은 아닐런지


그나저나 발어사로서의 무릇의 의미가 요즘처럼 필요한 때도 흔치 않을 것 같다.“ ‘무릇대통령이라면(국방장관이라면, 감사원 사무총장이라면, 국무총리 비서실장이라면, 여당 대표라면)...” 얘야, 네 이름 덕에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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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빈 의자를 대하면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던 조병화 시인의 시 '의자'가 생각난다. 세대교체를 의자의 내어줌을 통해 표현했다고 배운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고상한 작품보다 유행가 가락이 더 실감 나게 와닿는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모름지기 의자란 '권좌'의 상징. 의자를 차지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교체를 의미하며, 그것은 결코 순순히 이뤄지지 않고 싸움(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을 통해 이뤄진다. 저 고상한 시는 이런 실상을 도외시한 채 낭만적인 교체를 읊조리고 있기에 실감이 덜한 것이다.


그나저나 저 의자(사진)엔 앉는 사람이 없는지 낙엽이  깔려 있다. 앉을 만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들 한 걸까? 그것도 괜찮겠다. 앉을 만한 자리가 아닌데 굳이 앉는 것보다는. 자신이 앉을만한 자리가 아닌데 굳이 앉아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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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錦江上  구월이라, 금강

秋風一帆高  가을바람에 돛배 띄웠어라

兩崖楓葉亂  강 언덕에 단풍 분분히 지는데

漁夫坐蕭蕭  어부는 소슬히 배 안에


선친이 40년 전에 '뚝딱' 지은 시이다. 당시 작시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데 금방 지으신 것만은 선명하게 기억하기에  '뚝딱'이란 부사를 사용했다. 관념을 바탕으로 지은 시이기에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가을 분위기를 전하는 데는 나름 성공한 작품으로 보인다.


어제 문중의 부탁을 받고 10대조 비문을 번역했는데, 비문을 지은 분이 바로 선친이었다. 선친께서 1983년에 문중의 부탁을 받아 지은 비문이었던 것(이번에 처음 알았다). 거 참, 선친은 비문을 지으시고, 자식은 그 비문을 해석하고... 비문을 번역하며 오래전 선친이 지으신 시가 떠올라 잠시 되뇌어 보았다.


내게는 선비(先妣)께서 남기신 일기 한 권과 선친께서 남기신 한 시 몇 수가 있다. 세상 어느 것 보다 소중한 물건. 기회가 닿으면 둘을 하나로 묶어 책으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굳이 뿌리 교육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으니 글로라도 보면  뭔가 좀 색다른 느낌을 받을 것 같아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족보는 꿰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면 좀 아쉬운 일 아닌가. 그러고 보니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명절 제사는 아들아이에게 준비해 보라 할 참인데... 어떨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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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코스모스는 역시 길에 있어야 어울린다. 이런 길에 있어야 할 코스모스가 마당 한 곁에 가득하다(사진). 아내의 고집 탓. 그런데 환한 햇살아래 미풍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면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품었던 서운한 마음이 스르르 풀린다.

 

코스모스를 대하면 대학 시절의 한 교수님이 생각난다. ‘안조은교수님. 원 함자는 '안종운'인데, 학생들이 놀리느라고 만든 별칭이었다. 좋게 말하면 자기 생각 자기 논리가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자랑이 심한 분이었다. 이분이 생각나는 건, 이 분의 글 중에 특별한 코스모스가 등장하기 때문. “나는 영원히 코스모스를 미워하렵니다.” 어머니 상을 당한 뒤 마을 길에서 접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그 꽃이 그렇게 밉더라고 했다. 이 분이 쓴 효에 관한 논문에 나오는 일절이다.

 

당시는 , 효자시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외물은 내면의 반영. 내면이 슬프면 외물도 슬프게 느껴지는 건데,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면 평소 예쁘게 보이던 꽃도 슬프게 보였으련만, 하늘거리는 꽃을 그 자체로 아름다이 봤다면 마음속에 슬픔이 가득 고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효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위선적으로 등장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스모스의 꽃말은 소녀의 순정. 신이 세상을 만들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꽃을 만들기로 했는데, 제일 처음 만든 것이 코스모스란다. 코스모스는 질서·조화·우주의 뜻도 갖고 있다. 코스모스의 꽃말과 뜻으로 보면, 코스모스가 밉게 보이는 날이 어쩌면 생의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에 미움이 가득하여 코스모스가 밉게 보인다면, 더 이상 순수하지 않고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의 반증. 그렇다면 더 이상 세상에 머물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겠는가. 아니, 머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게 우주의 조화에도 어울리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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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過猶不及). 과한 것과 모자란 것은 같다, 란 뜻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굳이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모자란 것'을 택하겠다. 이유는? 그냥, 삶의 경험상. 하하. 하여 나는 '과유불급'보다 '과불여불급(過不如不及, 지나치기보다는 모자란 것이 낫다)'을 선호한다.

  

서산 시청 앞 선정비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비가 하나 있다. '군수류후민선정비(郡守柳侯旻善政碑)'가 그것.

  

류민은 광해군 때 서산군수를 지낸 인물로 염초를 많이 굽고 군량을 넉넉히 준비하였다 하여 특진한 인물이다. 사관(史官)은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 이조에서 은전(恩典) 대상자로 올렸다고 비판했지만, 어쨌든 은전을 받은 인물로 역사에 올라 있으니(이상 조선왕조실록 기사), 후손에겐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보일만도 하다. 하여 먼 후일 그의 후손 되는 광수(光秀)라는 이가 조상의 선정비를 수선(修繕)했다. 그리고 선정비 측면에 그 내용을 기록했다. '소화 17년 임오 8월 일 15세손 광수 수선(昭和十七年 壬午 八月 日 十五世孫 光秀 修繕)'. 소화 17년은 서기 1942년이다.

  

오호라, 소화라니! 조상은 필경 임진왜란을 겪어(광해군 때 지방관을 지냈으니 임진왜란을 겪었을 것은 불문가지) 왜놈이라면 이가 갈렸을 텐데, 그 후손 되는 이가 일제강점기 일본 천황의 연호를 써가면서 조상의 선정비를 수선하다니조상님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 아닌가! 조상을 애모하는 마음이 지나쳐 되려 조상을 욕되게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차라리 수선하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는가! 역시 '과불여불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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