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따로 마련된 것이 없어도 된다.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물이면 물, 수풀이면 수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로서 족하다. 머리 위에 보름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황홀하고 슬프고 유감한 것이다.”
김동리(1913-1995)의 수필「보름달」의 일부분이에요. 보름달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풍모를 찬미하고 있어요. 흔히들 나도향(1902-1926)의 「그믐달」과 견줘, 나도향의 그믐달이 이인(異人)의 달이라면 김동리의 보름달은 범인(凡人)의 달이라고 말하곤 하죠. 세상엔 이인보다 범인이 많고 보면 그믐달보다는 보름달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어요.
사진은 ‘영월단(迎月壇)’이란 비석에 새겨진 시예요. 달맞이 장소란 의미의 영월단에서 맞이한 달은 어떤 달이었을까요?
梧桐霽夜有情來 오동제야유정래 구름 걷힌 밤 오동나무에 달(유정) 찾아오니
坍上層峦映雪梅 단상층만영설매 단상 위 산봉우리에 설중매 보이네
氷魄天然菱花鏡 영백천연능화경 밝기는 천연의 거울(능화경)이요
玉輪怳惚琉璃杯 옥륜황홀유리배 둥글기는 황홀한 유리잔이로다
輞川別業愊時在 망천별업핍시재 힘든 시절에 망천의 별장 있나니
赤壁淸遊取次開 적벽청유취차개 적벽의 맑은 놀이 다시 열었네
白首主翁閒飮坐 백수주옹한음좌 흰 머리 노옹은 한가로이 앉아 술 마시고
詩朋隨影共相回 시붕수영공상회 시 벗들은 그림자 따라 왔다 갔다
앞 네 구는 영월단에서 맞이한 달의 모습을, 뒤 네 구는 영월단에서 함께 한 이들의 모습을 그렸어요. 비석에 보면 원운(原韵)이란 제목이 있는데, 원래의 운이란 뜻이에요. 영월단에서 함께 했던 이들이 시를 지었는데, 그 때 사용한 운이 바로 이 시에서 사용한 운(梅, 杯, 開, 回)이란 의미로 붙인 거예요.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제목은 아니예요.
시인은 시대와 불화를 겪고 있는 듯해요. 망천별업과 적벽청유가 이를 말해줘요. 망천별업은 왕유(王維, 699-761)가 정치적 시련기에 머물렀던 별장이고, 적벽청유는 소식(蘇軾, 1036-1101)이 유배 시절에 찾았던 적벽에서의 한유(閑遊)예요. 둘 다 시대와의 불화를 말해주는 것이지요. 시인은 이 둘을 통해 자신이 영월단에서 갖는 모임 역시 시대와의 불화에서 비롯된 것임을 드러냈어요. 아울러 왕유나 소식이 시대와의 불화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한층 더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났듯 시인 자신도 그러겠노라는 의지를 드러냈고요.
시인이 바라본 달은, 시 내용으로 봤을 때, 보름달에 가까워요. 그런데 시인은 시대와 불화를 겪고 있으니 이인이라 할 만 해요. 그렇다면 그믐달을 맞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왜 그믐달을 맞지 않고 범인의 달이라 할 보름달(에 가까운 달)을 맞았을까요? 그렇죠! 앞서 언급한대로 성숙을 지향코자 하는 의지 때문이지요. 시인이 맞이한 달은 범인의 달이면서 범인의 달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낯선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볼까요?
霽는 雨(비 우)와 齊(가지런할 제)의 합자예요. 비나 눈이 그쳤다, 란 뜻이에요. 雨로 뜻을 표현했어요. 齊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齊는 쌀이나 보리 이삭이 패어 전체적으로 키가 비슷비슷해진 모습을 나타낸 거예요. 이때가 되면 성장도 멈추죠. 이 의미로 비가 그쳤다란 의미를 보충하고 있어요. 개일 제. 霽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霽月(제월, 갠 날의 달), 霽朝(제조, 비가 갠 맑은 아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坍은 土(흙 토)와 丹(붉을 단)의 합자예요. 무너지다, 란 뜻이에요. 土로 뜻을 표현했어요. 丹은 음을 담당해요(단→담). 무너질 담. 坍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坍墻(담장, 무너진 담장)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坍은 단(흙을 높이 쌓아 올려 위를 평평하게 만든 장소)이란 뜻으로도 사용해요(壇(단 단)과 통용). 위 시에서는 이 뜻으로 사용됐어요. 이때는 음을 단으로 읽어요. 단 단. 이 경우 坍上(단상) 정도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巒은 작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는 산이란 뜻이에요. 山(뫼 산)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뫼 만. 巒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巒峰(만봉, 산봉우리), 巒岡(만강, 언덕. 작은 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魄은 白(흰 백)과 鬼(귀신 귀)의 합자예요. 넋이란 뜻이에요. 鬼로 뜻을 표현했어요. 白은 음을 담당해요. 魄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魂魄(혼백), 氣魄(기백)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魄은 달빛이란 의미로도 사용해요. 위 시에서는 달빛이란 의미로 사용됐죠.
菱은 艹(풀 초)와 夌(凌의 약자, 능가할 릉)의 합자예요. 마름이라는 수초(水草)를 표현한 글자예요. 艹로 뜻을 표현했어요. 夌을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마름은 물 위로 꽃을 피운다는 의미로요. 마름 릉. 菱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菱花(능화, 마름꽃. 거울의 별칭), 菱荷(능하, 마름과 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鏡은 金(쇠 금)과 竟(境의 약자, 지경 경)의 합자예요. 거울이란 뜻이에요. 金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초기의 거울은 구리 종류를 사용했죠. 그래서 금속 종류를 나타내는 金으로 거울이란 뜻을 나타낸 거예요. 竟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나라와 나라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이 지경이듯 대상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거울이란 의미로요. 거울 경. 鏡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銅鏡(동경, 구리 거울), 顯微鏡(현미경)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輪은 車(수레 거)와 侖(다스릴 륜)의 합자예요. 바퀴란 뜻이에요. 車로 뜻을 표현했어요. 侖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수레바퀴가 잘 굴러 가려면 바퀴살이 고르게 잘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 란 의미로요. 바퀴 륜. 輪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輪禍(윤화, 자동차 사고), 五輪(오륜, 올림픽)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琉는 옥과 흡사한 유리란 광물을 나타낸 글자예요. 王(玉의 약자, 구슬 옥)으로 뜻을 표현했도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유리 유. 琉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琉璃窓(유리창), 琉璃甁(유리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網은 糹(실 사)와 罔(그물 망)의 합자예요. 그물이란 뜻이에요. 본래 罔 만으로 그물이란 뜻을 표현했는데, 후에 糹가 추가되었어요. 그물 망. 網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網羅(망라), 投網(투망)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業은 본래 종을 걸어 놓는 틀을 뜻하는 글자였어요. 위는 거는 부분, 중간과 아래는 지지대와 다리를 표현했어요. 후에 '일'이란 뜻으로 전용됐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종을 거는 일을 한다, 란 의미로요. 일 업. 業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商業(상업), 職業(직업)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隨는 辶(걸을 착)과 墮(떨어질 타)의 약자가 합쳐진 글자예요. 뒤따라간다는 뜻이에요. 辶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墮의 약자는 음을 담당하면서(타→수)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 그같이 자연스럽게 뒤에서 앞을 따라간다는 의미로요. 따를 수. 隨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隨筆(수필), 隨行(수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현대 수필 중에 윤오영(1907-1976)의 「달밤」이란 짤막한 수필이 있어요. 그런데 이 수필을 읽다 보면 왠지 위 시에서 미처 표현하지 못한 정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과연 그런지, 한 번 읽어 보시겠어요?
내가 잠시 낙향(落鄕)해서 있었을 때 일. 어느 날 밤이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온 웃마을 김군을 찾아 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맞은 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고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 가겠습니다.” 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마을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하늘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잠겨 있었다. 노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 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
“마침 잘 됐소. 농주(農酒) 두 사발이 남았더니.......”하고 권하며, 스스로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마셔 본 적이 일찍이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 버렸다.
이윽고 “살펴 가우.”하고 노인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