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모두 신이 되죠. 귀신. 하지만 귀신, 하면 왠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존재처럼 느껴지죠. 그런데 사람들이 가까이 하고 싶은 귀신도 있죠. 수호신. 이들에게는, 그 귀신의 승락 여부와 관계없이, 제물을 바치며 자신들의 안녕을 기원하죠.

 

한 때는 똑같이 사람의 육신을 가진 존재였는데, 죽은 뒤 한 쪽은 꺼려지는 존재가 되고, 한 쪽은 가까이 하고 싶은 존재가 되었어요. 차이가 뭘까요? 한 쪽은 자신 만을 위해 살다간 존재이기에 죽어서도 역시 자신 만을 위해 살터이니 기대할 것이 없는 반면, 한 쪽은 타인을 위해 살다간 존재이기에 죽어서도 역시 타인을 위해 살터이니 기대할 것이 있기에 그런 것 아닐까요? 더구나 그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면 여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보태어져 더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사진은 '군수(郡守) 임공경업(林公慶業) 선정비(善政碑) 숭정(崇禎) 원년(元年, 1628) 사월(四月)' 이라고 읽어요. 임경업의 선정을 기념하는 비석이에요. 낙안읍성에 갔다가 찍었어요. 임경업은 낙안에서 2년(1626-1628)동안 군수로 재직했는데, 이 비석은 그가 낙안을 떠나던 해에 세워진 거예요.

 

임경업은 사후 평범한 귀신이 되지 않고 수호신이 되었어요. 최영, 남이 등과 함께 민간 신앙의 대상으로 추숭받고 있죠. 이 비석은 그런 신앙의 영향으로 해마다 제를 받으며 보호받고 있어요. 비석 상단에 금줄이 둘러져 있는 것을 보면 올 해도 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임경업 - 정묘호란 발발 시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으며(당시 낙안군수로 재직. 청과 화의가 이뤄져 실제 전투는 못함) 병자호란 때는 백마산성을 지키며 청군에 대비했으나 그를 꺼린 청군이 우회하는 바람에 제대로 전투를 못해 본 사람. 이후 청이 명나라를 궤멸시키기 위해 조선의 참전을 요청했을 때 청군에 파견됐으나 의도적으로 명과의 접전을 피했던 사람. 청에의 압송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하여 명군과 함께 청에 대항하려 했으나 명군의 속절없는 항복으로 청에 포로가 되었던 사람. 청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버텼으나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 심기원 역모 사건 연루자로 몰아- 국내로 송환된 뒤 김자점의 간계로 장살된 사람.

 

겉으로는 청을 배격하지만 실제로는 청에 굴종할 수 밖에 없었던 국내외 정치 상황에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친명배청의 대의를 내건 그의 과감한 행동은 민중들에게 많은 호감을 안겨줬을 거예요. 게다가 그가 낙안군수 재직시 보여준 선정이나 북방의 경비를 맡을 당시 명과의 무역거래로 민부병강(民富兵强, 백성은 부유하고 군사는 강해짐)을 이룩한 성과를 볼 때 적절한 뒷받침만 있었으면 그의 분투가 충분한 성과를 얻었으리란 가정을 하게 되면 호감에 안타까움까지 더해지겠죠. 그가 민중들에게 수호신으로 받을어질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는 달리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거예요: 민중들은 임경업의 삶에서 바르게 살려 노력하지만 늘 억울하게 핍박받으며 살아야 하는 자신들의 삶을 보았고, 그랬기에 그가 죽은 뒤에는 자신들의 삶을 이해하고 도와주리란 기대를 품었기에 수호신으로 섬긴 것이다. 임경업은 민중의 메시아였다.

 

한자를 공부해 볼까요?

 

慶은 鹿(사슴 록)의 약자와 心(마음 심)과 夊(천천히 걸을 쇠)의 합자예요. 기뻐할 일이 있어 사슴 가죽을 가지고 가 축하해 준다는 의미예요. 경사 경. 慶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慶賀(경하), 慶事(경사)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業은 본래 종을 거는 틀을 그린 글자예요. 윗 부분은 종을 거는 상체를, 중간 부분은 장식물을, 아래 부분은 받침대를 나타낸 거예요. 후에, 종을 건다→일을 한다로 의미가 변화되었어요. 일 업. 業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就業(취업), 業種(업종)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將은 寸(마디 촌)과 酱(장 장)의 약자가 합쳐진 거예요. 장수라는 의미예요. 장수는 원칙과 법도가 있어야 부하를 통솔할 수 있기에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寸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酱의 약자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장(간장, 된장)은 맛을 조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같이 부하들의 여러 요구를 잘 조화시켜 이끌어야 하는 이가 장수란 의미로요. 장수 장. 將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將軍(장군), 將星(장성)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崇은 山(뫼 산)과 宗(마루 종)의 합자예요. 산이 높고 크다란 뜻이에요. 山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宗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宗에는 시조(始祖)라는 뜻이 있는데, 시조는 뭇 자손들의 가장 높은 존재이죠. 그같이 가장 높은 산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해주고 있어요. 높을 숭. 崇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崇尙(숭상), 崇仰(숭앙)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禎은 示(神의 약자, 귀신 신)과 貞(곧을 정)의 합자예요. 상서롭다란 뜻이에요. 示로 뜻을 표현했어요. 貞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곧아야, 즉 정직해야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란 의미로요. 상서로울 정. 禎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禎祥(정상, 상서, 길조), 禎瑞(정서, 상서, 길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임경업은 서해 지역에서 풍어신(豊漁神, 고기를 잘 잡게 해주는 신)으로 많이 숭배되고 있어요. 특히 조기잡이 철과 관계 깊은 풍어신으로 숭배되는데, 이는 임경업이 중국으로 망명한 시기와 상관성이 있어요. "조기 어군의 경우, 1~2월에 제주도 아래 남지나해 쪽에서 겨울을 난 후 흑산도와 홍도 일대에서 첫 어장이 형성되고, 영광 앞바다 안마도 어장을 거쳐 3월 초에는 전라도 부안 앞바다 칠산 어장에 이르게" 되는데 "수온이 상승함에 따라 북상해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 앞바다 죽도와 태안반도 앞 격렬비열도를 잠시 거쳐, 연평도 어장에서 산란을 하고 6월 말경에는 평안도 철산의 용암포 앞바다까지 이른다"고 해요. 임경업은 6월 마포 나루에서 출발해 서해를 거쳐 중국으로 갔는데, 이 시기가 바로 조기 어군의 이동과 관계 깊기에 조기잡이 철의 풍어신으로 숭배받게 됐다고 보는 거지요.(인용문: 이영태)

 

여담 둘. 선정비의 하단 거북의 모습이 상당히 유머러스하죠? 보통 비석 하단의 거북은 입을 다문 엄정한 모습인데 이 비석의 거북은 상당히 편안하고 해학적인 모습이에요. 선정비를 세운 이들이 외압에 못이겨 마지못해 선정비를 세운 것이 아니라 - 많은 경우 선정비는 외압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세워졌지요 - 진심에서 우러나 선정비를 세운 것이란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듯 해요. 볼수록 정감가는 거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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