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은 황소 글력(근력)으로 쥐고, 먹은 새[鳥] 글력으로 갈아야 해!"

 

어렸을 때 붓글씨를 쓸 적마다 선친께서 해주시던 말씀이에요. 하지만 저는 늘 반대로 했어요. 먹물을 빨리 만들려고 황소 근력으로 먹을 갈았고, 글씨를 그림 그리듯이 예쁘게 쓰려고 새 근력으로 붓을 잡았어요. 선친은 늘 혀를 차셨죠. 특히 붓을 잡을 때는 더욱 그러셨는데, "아예, 붓털을 잡고 쓰지 그러냐!" 하실 정도였어요. 붓을 잡는 힘이 약하다보니 점점 붓대 하단을 잡고 글씨를 썼기 때문이이에요.

 

당시는 도저히 선친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중년이 된 지금은 이해할 것 같아요. 서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두 가지는 운필(運筆)과 먹물의 농담(濃淡)인데, 자유롭게 운필하기 위해서는 다다 붓대를 힘있게 높이 쥐고 움직여야 하며 먹물의 농담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먹을 갈아야 하기 때문이죠. 성마른 어린 시절 선친의 질책을 들어가며 붓글씨를 쓰는 것은 고역이었어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붓을 놓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좀 아쉬운 일이지만 당시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하하. 앞으로 혹 다시 서예를 하게 된다면, 선친의 말씀을 충실히 따를 것 같아요.

 

고창 선운사에 갔다가 선친께서 그토록 강조하던 필법의 글씨를 만났어요. 바로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백파 선사 비문이에요. 비문을 대하니 과시 명필은 명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진의 한자를 읽어 볼까요?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읽어요. 화엄종주는 화엄종의 최고 인물이란 의미이고, 백파는 긍선(亘璇, 1767-1852)이란 승려의 법호이며, 대율사는 불교의 교리에 해박한 승려란 의미이고, 대기대용은 부처님의 마음[대기]과 가르침[대용]이란 의미예요(대기 · 대용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저는 유홍준 교수의 설명을 따랐어요.『완당평전2』참조). '화엄종주백파대율사지비'라고 해도 될 것에 굳이 '대기기용'이란 말을 덧붙인 것은 백파 스님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하는 조사선(祖師禪)에 입각하여 교선(敎禪)의 문제를 다룬 학승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예요.

 

한때 추사 김정희 선생은 선(禪)의 구분을 놓고 백파 선사와 논쟁을 하면서 감정적인 언사로 선사를 반박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가 돌아간 후 흔쾌히 비문을 짓고 쓴 것을 보면 선사에 대한 존중의 념(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실제 비문 뒷면에도 이를 짐작케하는 대목이 나와요: "예전에 나는 백파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한 적이 있는데 이를 갖고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아무리 만 가지 방법으로 입이 닳게 말한다 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어찌하면 다시 스님을 일으켜 서로 마주앉아 한번 웃을 수 있으리요(昔 與白坡頗有往復辨難者 即與世人所妄議者大異 此個處惟坡與吾知之 雖萬般苦口説 人皆不解悟者 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번역 인용처: 유홍준,『완당평전2』)

 

이 비문 글씨는 추사 선생 만년의 최고 가는 해서 · 행서로 평가받아요(전면은 해서, 후면은 행서로 씌였어요). 그런데 현재 세워져 있는 비석은 아쉽게도 모조품이에요. 워낙 많은 이들이 탁본을 떠가다보니 비석에 손상이 생겨 모조품으로 대체해 놓은 거죠. 비록 모조품이긴 하나 추사체의 특징 중 하나인 '역(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요. 비석을 뚫을 듯한 강렬한 힘이 느껴져요. 언젠가 추사 선생의 '서결(書訣, 글씨쓰는 비결)'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요지는 '온 몸의 충실한 힘과 정기가 붓끝에 모아져 종이를 뚫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이 비문의 글씨는 바로 그 서결의 요지를 오롯이 표현하고 있는 듯 해요.

 

낯선 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華는 꽃이 피었다란 의미예요. 윗 부분의 艹(풀 초)로 뜻을 나타냈고, 아래 부분은 음[화]을 담당해요. '빛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꽃(빛날) 화. 華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華麗(화려), 榮華(영화)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嚴은 본래 상부의 지시가 급하다란 의미예요. 급하면 큰소리로 전달해야 하기에  吅(부르짖을 훤)으로 의미를 나타냈어요. 吅 아래 부분은 음[엄]을 담당해요. 지금은 '엄하다'란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긴급한 지시일수록 상대가 잘 알아듣도록 엄하게 전달한다란 의미로요. 엄할 엄. 嚴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嚴命(엄명), 嚴親(엄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宗은 宀(집 면)과 示(神의 약자, 귀신 신)의 합자예요.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란 의미예요. '마루'라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가묘(마루) 종. 宗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宗社(종사), 宗家(종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坡는 土(흙 토)와 皮(가죽 피)의 합자예요. 고개 혹은 둑이란 뜻이에요. 土로 뜻을 나타냈어요. 皮는 음을 담당해요(피→파). 고개(둑) 파. 坡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坡岸(파안, 제방), 坡陀(파타, 경사지고 평탄하지 아니한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律은 본래 가락을 조율하는 악기라는 뜻이었어요. 행하다란 의미의 彳(걸을 척)으로 뜻을 나타냈어요. 聿은 음[률]을 담당해요. 법이라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가락을 조율하듯 사람들의 행동을 조율하는 것이 법이란 의미로요. 가락(법) 률. 律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調律(조율), 法律(법률)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機는 베틀이란 의미예요. 木(나무 목)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幾(기미 기)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미세한 움직임이란 의미의 기미처럼 미세한 날줄과 씨줄을 이용하여 옷감을 짜는 기계가 베틀이란 의미로요. 기틀, 실마리 등의 의미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모두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베틀(기틀, 실마리) 기. 機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機械(기계), 機會(기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추사체의 가장 큰 특징은 '기괴(奇怪)'죠. 기괴의 특징은 파격(破格)인데, 재미있는 것은 추사 선생이 전통적인 서예 수련 과정을 무척 강조했다는 점이에요. 해서의 전범이라 할 당대의 구양순과 저수량 등의 글씨를 충분히 수련하고 이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서법을 수련할 것과 많은 법첩들을 열람할 것을 강조하고 있거든요. 아울러 충분한 독서도 강조하고 있구요. 추사체의 기괴는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지음)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거에요. 기본기를 등한시한 채 어설픈 파격을 창조입네 과시하려는 서예인들이 본받아야 할 점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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