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사람들이 흔적, 좀 더 정확하게는 문자나 문자와 유사한 흔적을 남긴 역사는 무척 오래되었죠. 서양 미술사의 첫 장을 장식하는 알타미라나 라스코의 동굴 벽화도 일종의 문자와 유사한 흔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남긴 문자의 흔적사가 얼마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죠. 더구나 알타미라나 라스코의 동굴 벽화가 상당히 정제된 표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 이전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상정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람이 남긴 문자의 흔적사는 한층 더 위로 올라가겠죠.

 

사람들은 왜 문자의 흔적을 남긴 걸까요? 다방면의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영원성에 대한 동경이 가장 큰 요인 아닐까 싶어요.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은 거죠. 그 욕망중에서 가장 큰 욕망은 당연히 영원히 살고 싶은 거겠죠. 비록 자신의 육신이 사라진다해도 문자로 남긴 흔적은 영원히 살아 자신의 삶을 대체한다고 믿는(믿고 싶은) 그런 불멸에 대한 욕망이 문자의 흔적을 남기게 한 것 같아요. 비록 그것이 역사에 발자국을 남긴 이의 흔적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죠.

 

사진은 정와(靜窩) 김인중(金仁中) 경암(敬庵) 김노수(金魯銖)라고 읽어요. 고창 선운사의 용문굴에 새겨진 흔적이에요. 『한국인명대사전』(신구문화사)과 『동양학대사전』(경인문화사)을 찾아 봤지만 이름이 올라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 유명한 분의 성명은 아닌듯 싶어요. 두 사람은 왜 용문굴에 자신들의 호와 이름을 새긴 걸까요? 그건 앞서 말한대로 영원성에 대한 동경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바로 저 조용필의 노래 '킬로만자로의 표범' 한 대목처럼 가뭇없이 사라지는 삶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은 흔적을 남기는 것 밖에 없다는 욕망에서 말이죠. 비록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지만, 두 분은 꽤 오랫동안 그 욕망을 충족시킨 것 같고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낯선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魯는 日(白의 변형, 나타낼 백)과 魚(물고기 어)의 합자예요. 노둔하다(어리석다)란 의미예요. 어리석은 이는 말과 행동으로 그 어리석음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日을 가지고 의미를 나타냈어요. 魚는 음을 담당해요(어→노). 노둔할 노. 나라 이름으로도 사용해요. 나라이름 노. 魯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魯鈍(노둔), 魯論語(노논어.『논어』초기본 중의 하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銖는 金(쇠 금)과 朱(붉을 주)의 합자예요. 중량 이름이에요. 흔히 양(兩)의 1/24을 가리키는 무게라고 하는데 일정한 정설은 없어요. 다만 극소의 무게를 나타내는 단위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朱는 음을 담당해요(주→수). 銖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錙銖(치수), 銖分(수분, 세밀히 분석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靜은 靑(푸를 청)과 爭(다툴 쟁)의 합자예요. 본래 뜻은 '분명하게 살펴본다'였어요. 靑은 초목이 싹을 틔울 때의 색으로 그 빛깔이 선명하죠. 그래서 이 글자로 '분명하게 살펴본다'란 뜻을 표현했어요. 爭은 음을 담당하면서(쟁→정)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분명하게 살펴보려면 요란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요. 靜은 주로 고요하다란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고요할 정. 靜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靜寂(정적), 靜中動(정중동)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窩는 穴(구멍 혈)과 咼(입비뚤어질 괘)의 합자예요. 움집이란 뜻이에요. 穴로 뜻을 표현했어요. 咼는 음을 담당하면서(괘→와)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움집은 출입구가 반듯하지 않다란 의미로요. 움집 와. 窩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窩家(와가, 도둑들의 소굴), 窩主(와주, 도둑들이 훔친 물건을 감추어 두는 곳)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구비문학이란 것이 있죠.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온 문학이란 뜻이죠. 여기서 구비란 말 그대로 입[口]에다 새긴 비석[碑]이란 뜻이죠. 구비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면서 또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흔적 남기기 방법이에요. 비근한 예로 우리 부모님들의 삶은 대부분 구비로 그 흔적이 남죠. 갖가지 표기 방식이 발달한 현대에 여전히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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