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게 개어 풀잎마다 이슬이 보석처럼 빛나는 싱그러운 아침, 앞산에는 산그늘이 내리고 뜰에는 찬그늘이 내리는 해질녘의 한 때, 고독과 정적 속에서 내 산거(山居)는 선열(禪悅)로 충만하다. 꽃처럼 부풀어오른 이런 순간을 나는 아무에게도 그 어떤 일에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인생의 화폭에 넓은 여백을 지니고 싶다." (법정(法頂), 『산방한담(山房閑談))

 

80년대 초반, 집에서 홀로 재수를 하던 때 였어요. 무료하여 신문을 뒤적이는데 책 광고 하나가 유달리 눈에 띄었어요. "명사들에게 추천된 단 한 권의 에세이! 산방한담." 오래되어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광고 였어요. 명사들에게 추천받은 그 해의 좋은 책이 신문 지상에 소개됐는데 『산방한담』이 에세이로는 유일하게 그 목록에 들었다는 거였어요. 귀가 얇다보니 광고에 혹해 출타하시는 아버지께 부탁을 드려 책을 구매했어요.

 

『산방한담』한 대목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신 새벽 차가운 냉수를 들이킨듯 한 느낌이었어요. 어쩌다 읽어 본 스님들의 글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왠지 우중충한 느낌이었는데, 법정 스님의 『산방한담』은 그런 기존의 이미지를 일거에 불식시켰어요. 무엇보다 이해하기가 쉬웠고 투명한 감성이 반영된 산뜻한 문체는 읽는 내내 가슴을 씀벅하게 만들었어요. 이후 법정 스님의 책이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사 읽게 됐어요.

 

사진은 '불일암(佛日庵)'이라고 읽어요. 순천 송광사에 딸린 암자로, 법정 스님 에세이의 산실(産室) 이름이에요. 불일(佛日)은 태양같은 부처님이란 뜻으로, 태양이 세상의 어둠을 환히 밝히듯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의 무명번뇌를 환히 일깨워 준다는 의미로 사용된 거예요. 암(庵)은 작은 집이란 의미이니, 불일암은 '태양같은 부처님을 모신 작은 집'이란 의미가 돼요. 암자 이름으로는 좀 벅찬 이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기에는 법정 스님의 원대한 포부가 담겨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봐요. '내 비록 이 작은 암자에 살지만, 여기서 깨달은 부처님의 태양같은 지혜를 온누리에 펼쳐 보이겠다'란 포부 말이죠. 스님은 자신의 포부를 충분히 펼쳤을까요? 해답은 스님 자신만이 아시겠죠?

 

스님 생전에 불일암을 찾고 싶었는데, 사후 불일암을 찾게 됐어요. 스님은 자신이 생전에 사랑했던 후박나무 밑에 한 줌의 재로 묻혀 계시더군요. 스님이 앉았을 법한 원탁 의자에 앉아 스님이 『산방한담』에서 묘사했던 불일암 앞산을 잠시 바라봤어요. 스님의 책을 읽고 제가 무슨 영향을 어떻게 받았는지는 저 자신도 정확히 말하기 힘들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다른 이의 책을 읽을 수도 있었을 때에 굳이 스님의 책을 읽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기억의 파편으로 남아 부지불식간에 저의 행동을 지배했을 거라는 점이에요. 스님 생전에 불일암을 찾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볼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이 왠지 더 차갑게 느껴지더군요.

 

佛, 庵 두 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佛은 人(사람 인)과 弗(아닐 불)의 합자예요. 사물을 보는 것이[人] 정밀하고 명확하지 못하다[弗]는 의미예요. 보통 '부처 불'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산스크리트어 'Buddha'를 음역한 것이에요(佛陀에서 佛로 축약). 지금은 원의미로는 사용하지 않고 '부처'라는 뜻으로만 사용해요. 부처 불. 佛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佛敎(불교), 佛像(불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庵은 广(집 엄)과 奄(가릴 엄)의 합자예요. 풀로 지붕을 덮은 작은 집이란 의미예요. 암자 암. 庵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庵子(암자)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여담. 불일암에는 참배객이 많아 오전 8시에서 오후 4시까지 방문 시간을 제한하고 있어요. 아울러 참배할 때는 '묵언(默言)'을 지켜 달라고 강조하고 있구요. 묵언 요청은 스님 생전부터 방문객에게 요청된 덕목(?)이에요. 현재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스님의 제자도 이를 이어받고 있는 셈인데, 누구 못지 않게 많은 말들을 쏟아낸 스님이건만 정작 자신(제자)을(를) 찾는 이들에게 묵언을 요청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차적으로야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겠지만, 그보다는 수많은 말보다 외려 침묵이 더 값어치 있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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