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야금을 배운 지 60여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조금만 연습을 소홀히 하면 모처럼 얻은 성음(聲音)을 놓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황병기, 『논어 백가락』)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은 팔순을 넘긴 나이인데도 여전히 자신의 가야금 솜씨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요. 범인이 보기에 그만한 연륜에 그만한 실력이면 더 찾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아직도 만족을 못느껴 부단히 가야금 연습을 한다 하니, 과시 명인은 함부로 얻는 칭호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진은 조선조 18세기 예원(藝苑)의 총수로 불렸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 선생의 난죽도권(蘭竹圖卷) 낙관 부분이에요. 읽어 볼까요? 조송설화후 내감체필난사 가위담여두의 참황살인 경술중춘 표옹서 시년칠십유팔(趙松雪畵後 乃敢泚筆亂寫 可謂膽如斗矣 慙惶殺人 庚戌仲春 豹翁書 時年七十有八). 풀이해 볼까요? "송설 조맹부의 그림 뒤에 감히 붓을 들어 되잖은 그림을 그렸으니 무모하다 이를만 하다. 부끄럽고 두려워 죽을 지경이다. 경술년(1790) 중춘(음력 2월) 표암 늙은이 쓰다. 내 나이 78세 때이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자 당시 예원의 총수로 불렸던 이가 한 말 치고는 너무 겸손하여 읽는 이들이 어리둥절할 지경이에요. 더구나 이 작품이 생을 마감하기 한 해 전에 완성된 것임을 상기할 때 낙관의 내용은 자학에 가까울 정도의 겸사를 사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시원시원한 구성과 완숙한 필력으로 그려졌다. 평생의 필력을 다 쏟아부은 강세황 사군자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민길홍)." "습윤한 수묵법의 바위와 속도감있게 처리된 경쾌한 갈필법의 난엽과 댓잎은 농담과 소밀의 대조 만큼이나 정확하고 분명하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노숙하면서도 전형화된 필치는 만년기 강세황의 죽석, 난초 그림에 드러나는 특징이다(2013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특별전 해설)." 이런 후대의 평가를 들어보면 선생의 겸사에 대해 갖는 의아스러움은 더욱 증폭되죠.
선생은 정말 자신의 말처럼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없었던 걸까요? 객관적 호평과는 달리, 어쩌면 실제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서 보면 말이죠.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이 자신의 가야금 연주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황병기 명인이나 강세황 선생이 훌륭한 예술가라는 점은 바로 이 점에 있는 것 같아요. 범인이라면 만족하고도 남을 경지에 이르렀건만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매진하는 그 열정과 성실 말이죠. 두 예술가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그들의 높은 예술적 성취이겠지만 그보다 그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성실이 우선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낯선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泚는 氵(水의 변형, 물 수)와 此(이 차)의 합자예요. 물이 맑다는 뜻이에요. 氵로 뜻을 표현했어요. 此는 음을 담당해요(차→체). 위 낙관에서는 '담그다'란 뜻으로 사용됐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맑을(담글) 체. 泚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泚筆(체필, 붓으로 먹물을 찍음)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亂은 어지럽게 뒤엉킨 실을 양손으로 정리하는 모양을 그린 거예요. 왼쪽 부분이 직접적으로 이 모양을 나타냈고, 오른쪽의 乙(굽을 을)은 실이 뒤엉킨 상태를 강조하기 위하여 덧붙인 거예요. 다스릴 란. 일반적으로 '어지럽다'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뒤엉킨 실의 상태만을 강조하여 표현한 의미예요. 어지러울 란. 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亂臣(난신, 나라를 잘 다스리는 신하.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라는 의미로도 사용), 混亂(혼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寫는 宀(집 면)과 舃(신발 석)의 합자예요. 다른 장소에 있는 물건을 현재 장소에 가져다 놓았다란 의미예요. 공간, 장소의 의미를 지닌 宀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舃은 음을 담당하면서(석→사)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신발은 땅 위를 밟는 물건인데, '가져다 놓는 것'은 그같이 다른 물건을 기존의 물건 위에 올려놓는 행위란 의미로요. 놓을 사. 일반적으로 '베낀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베낄 때는 베끼려는 대상 위에 종이나 천을 올려 놓잖아요? 베낄 사. 寫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複寫(복사), 寫本(사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膽은 月(肉의 변형, 고기 육)과 詹(넉넉할 담)의 합자예요. 쓸개라는 뜻이에요. 月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詹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쓸개는 항시 즙(汁)을 배출한다는 의미로요. 쓸개 담. 담력이라는 의미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담력은 쓸개와 상관이 많기 때문이죠. 담력 담. 膽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膽如斗(담여두, 담(력)이 큰 것을 형용하는 말), 熊膽(웅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慙은 心(마음 심)과 斬(벨 참)의 합자예요. 목을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다란 의미예요. 부끄러울 참. 慙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慙愧(참괴), 慙悔(참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惶은 忄(心의 변형, 마음 심)과 皇(클 황)의 합자예요. 두렵다란 의미예요. 忄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皇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성대(盛大)한 것 앞에서는 두려움 마음이 든다는 의미로요. 두려울 황. 惶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惶恐(황공), 惶悚(황송)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豹는 豸(발없는벌레 치)와 勺(구기 작)의 합자예요. 표범이란 뜻이에요. 표범의 허리가 길기에 豸로 뜻을 표현했어요. 勺은 음을 담당해요(작→표). 표범 표. 豹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豹變(표변, 마음과 행동이 갑자기 달라짐), 土豹(토표, 스라소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강세황 선생은 태어날 때 부터 등에 표범 무늬와 같은 문신이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자신의 호를 표암이라고 했다는 군요(표암은 표범이 사는 집이란 의미).
여담 하나. 아래 그림은 난죽도권 그림 부분이에요. 대나무와 난초를 한 화면에 배치한 것이 특이해요. 대개 사군자는 별개로 그리는데 말이죠.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런 시도는 강세황이 처음 했다고 나오더군요. 「영통구도(靈通口圖)」에서 서양의 원근법을 도입하여 산수화를 그리는 실험 정신을 보였던 그였기에 이런 배치의 그림을 시도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어요. 이런 배치의 그림이 지금 우리에겐 별 것 아닌 것 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무척 파격적인 것으로 보였을 거예요. 전통의 답습을 깬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글씨와 그림의 사진은 인천공항에서 찍었어요. 당연히 모사품이고, 진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어요.
여담 둘. 우리 세대는 중고등학교에서 동양의 전통 그림에 대해 배운 적이 없어요.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뭐 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배운 것 하고 안배운 것은 차이가 있지요. 조금이라도 귀동냥을 했다면 동양의 전통 그림에 대해 좁쌀만한 안목이라도 있을텐데 전혀 배운 적이 없다보니 동양의 전통 그림에 대해 거의 백치 상태예요. 강세황 선생의 묵죽도권에 대해 저의 느낌을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고 타인의 감상평을 빌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예체능 교과가 주지 교과에 밀려 홀대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니, 아니 더 심해졌으니, 별다른 개선이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