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보셨는지요? 병자년(1636) 청군의 침략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조정의 대응을 그린 영화지요. 원작자 김훈의 맑고 굳세면서도 허무 냄새 짙은 문체처럼 영화 역시 그런 느낌을 주더군요.
영화 초반에 보면 김상헌이 홀로 어부의 도움을 받아 언 강을 건너는 장면이 나와요(강을 건넌 뒤 어부를 죽이죠). 남한산성에 뒤늦게 합류한 것이죠. 조정 대신이 일거에 떠나지 못하고 뒤늦게 합류한 것을 보면 당시 인조의 피난 행렬이 무척 황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김상헌처럼 뒤늦게 남한산성에 합류하려 했던 대신들 중에 예조판서였던 조익(趙翼, 1579 - 1655)이 있어요. 하지만 조익은 김상헌처럼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강화도로 피신했어요. 청군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죠.
사진은 조익의 사적비예요. '포저 조익 선생 사적비(浦渚 趙翼 先生 事蹟碑)'라고 읽어요. 예산군 신창면에 있는데, 추석 연휴에 우연히 방문했다가 찍었어요. 포저는 조익의 호예요.
비문은 조순 전 서울시장이 썼는데, 사적비가 으레 그렇듯, 상찬 일색이더군요: "폐지의 위기에 직면한 대동법을 존속시키었"고 "청국의 굴기에 즈음하여서는 국방강화의 필요성을 예견하여 방비책을 주청하였"으며 "과거제도에 관하여도 강경제도(講經制度)의 폐단을 시정하고… 바꾸기를 건의하였"다. "불편부당의 정신을 견지하"여 "이회제 이퇴계 양현을 비방하는 일부의 논의를 적극 반박하였고" "이율곡 성우계 양현의 문묘배향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조정이 소연하였을 때… 양현의 배향 타당성을 적극 주청하다가 끝내 관직을 사임하였다." "의식주의 사치를 멀리하였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장유 최명길 이시백 선생 제공과는 소시부터 친한 사이였고 평소 김청음[김상헌] 선생을 경애하였지만 공론에 임하여는 사적인 친소에 관계 없이 공정한 견지를 떠나지 않았"다. "도학자 정치가로서는 아주 드물게 보는 섬세한 예술적 감각과 사물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이 있었다"
조익에게는 아킬레스건이 있어요. 바로 인조의 어가에 합류하지 못한 점이죠. 조익은 인조의 환도후 어가에 합류하지 못한 일로 인해 지탄을 받았어요. 이에 대해 사적비는 "병자호란등 내우외환의 혼란 속에서 선생의 관력도 여러번 좌절을 겼었"다라고만 적고 있어요.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내용을 두루뭉실하게 적고 있는 것이죠. 조순 시장은 조익의 족손(族孫)이에요. 위와 같은 기술은 족손으로서 불가피한 기술이었을거란 생각도 들지만 사적비가 타인들에게 그 인물에 대한 감정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금은 아쉬운 기술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낯선 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浦는 氵(물 수)와 甫(남자미칭 보)의 합자예요. 물가에 인접한 땅이란 뜻이에요. 氵로 뜻을 표현했어요. 甫는 음을 담당하면서(보→포)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남자의 미칭(美稱)처럼 풍경이 수려한 곳이 해안에 인접한 땅이란 의미로요. 물가 포. 浦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浦口(포구), 浦項(포항)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渚는 氵(물 수)와 者(黍의 약자, 기장 서)의 합자예요.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작은 섬이란 뜻이에요. 氵로 뜻을 표현했어요. 者는 음을 담당하면서(서→저)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기장의 많은 낱알처럼 많은 물로 둘러싸인 섬이란 의미로요. 섬 저. '물가'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해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지요. 물가 저. 渚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渚岸(저안, 물가), 渚鷗(저구, 물가에 있는 갈매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翼은 羽(깃 우)와 異(다를 이)의 합자예요. 날개라는 뜻이에요. 羽로 뜻을 나타냈어요. 異는 음을 담당하면서(이→익)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한 몸에서 좌우 양쪽으로 다르게 펼쳐지는 것이 날개란 의미로요. 날개 익. 翼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左翼(좌익), 翼室(익실, 좌우쪽에 있는 방)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蹟은 足(발 족)과 責(맡을 책)의 합자예요. 발자취란 뜻이에요. 足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責을 음을 담당해요(책→적). 蹟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史蹟(사적), 奇蹟(기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碑는 石(돌 석)과 卑(낮을 비)의 합자예요. 다음 세 가지 주 용도로 사용되던 키작은 돌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어요: 제사에 쓰일 짐승을 묶어 놓음. 시간을 알기 위해 세워 놓음. 하관(下棺)시 보조 설치물. 돌기둥 비. 후에 기릴만한 인물이나 돌아간 이의 행적을 적는 돌이란 의미로 전용(專用) 됐어요. 전용 의미는 본뜻 세 번째 뜻(하관시 보조 설치물)에서 연역됐다고 볼 수 있어요. 비석 비. 碑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墓碑(묘비), 碑文(비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조익은 청군의 경비가 삼엄하기 전 인조의 어가에 합류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강화도로 피신시키려던 아버지를 도중에 잃어버리는(?) 바람에 시기를 놓쳤어요. 아버지를 찾아 강화도에 피신시킨 뒤 남한산성에 들어가려 했지만 이미 시기를 놓쳤던거죠.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켜 청군을 격파하려 했지만 이도 실패했어요. 군사를 이끌던 장수가 전사했기 때문에 군대를 해산시킬수 밖에 없었거든요. 조익은 강화도로 피신하여 눈물의 나날을 보냈어요. 환도 뒤, 앞서 말한대로, 지탄을 받았지만 효행(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음)과 노력(근왕병을 일으킴)을 인정받아 지탄에서 벗어 낫지요. 여기에는 인조의 지지도 한 몫을 했던 것으로 보여요. 송시열이 지은 조익 비문에 보면 인조가 조익을 옹호하여 "그는 독서인(讀書人)일 뿐이지 않은가!"라고 했다는 대목이 나와요. 조익의 한계와 한계 내에서 애쓴 노력을 인정해줬던 것이지요.
여담 둘. 조익은 이따금 양명학자로 취급되기도 해요. 「대학곤득(大學困得)」,「용학곤득(庸學困得)」등을 통해 주자와 다른 견해를 제시한 점과 개혁적인 정책들을 많이 제시한 점 등을 그 근거로 들고 있죠. 하지만 이는 양명학을 혹호(酷好)하는 연구자들의 지나친 견해라는게 중론이에요. 조익이 개혁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었고 경학에 있어서도 주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양명학자로 취급한다는 것은 확실히 침소봉대의 견해인 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