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또다른 피서 명소인 ㅇㅇㅇㅇ공원입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인데 발디딜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새벽의 모습은 전날 밤과 크게 다릅니다. 빈 술병과 생수통은 물론이고 먹다남은 음식이 돗자리 위에 그대로 놓여있습니다. 밤새 북적이던 이곳은 사실상 쓰레기장으로 변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본 한 방송사의 뉴스 일부분이에요. 일부분만 떼어놓고 보니 딱히 오늘 뉴스라기 보다 해마다 피서철만 되면 접하게 되는 뉴스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모른긴해도 내년 이맘때 쯤에도 역시 똑같은 뉴스가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이런 뉴스를 접할때 마다 드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 오죽 덥고 답답했으면 저렇게 질펀하게 한 여름 밤을 보냈겠어? 그런데, 과연 덥고 답답한 것은 얼마나 해소됐을까?"

 

사진은 경주 대릉원에 갔다가 찍은 거예요. 대릉원 후문 맞은 편에 법장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 담벼락에 걸려있는 현수막이에요. 한자를 읽어 볼까요? 수인조선 궁공조각 재장조목 지자조신(水人調船 弓工調角 材匠調木 智者調身). 해석은? 현수막에 나와 있네요! ^ ^ "물대는 사람은 물을 끌고, 활 만드는 사람은 활을 구부리며, 목공은 나무를 다루고,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를 다스리네." 『법구경』6장 현철품(賢哲品)에 나오는 말이에요. 그런데 '수인조선(水人調船)'은 "물대는 사람은 물을 끌고"라고 해석하기 보다 "사공은 배를 손질하고"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아요. '선(船)'이 배란 뜻이니 '수인(水人)'은 사공으로 해석하는 것이 나을 듯 싶은거죠. "물대는 사람은 물을 끌고"는 의미가 불분명한 의역이란 생각이 들어요.

 

이 문구는 이런 의미예요. "물을 끌어들이는 이가 물대는 사람이고, 활을 구부리는 이가 활 만드는 사람이며, 나무를 다루는 이가 목공이듯, 자신을 잘 다루는 이가 바로 현명한 사람이다." 현명한 사람에 대한 정의를 내린 것이죠. 그런데 위 문장을 이렇게 해석해 보면 의미가 확 달라져요. "물을 끌어들이는 이가 물을 대듯, 활 만드는 사람이 활을 구부리듯, 목공이 나무를 다루듯, 현명한 사람은 그같이 자신을 다스린다." 현명한 사람의 마음 다스리는 요령을 소개한 것이 돼죠.

 

이런, 현수막의 문구를 흠집 잡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방향이 엉뚱한데로 갔네요. 다시 원 위치로. 현수막에 나온『법구경』의 내용이 현명한 사람에 대한 정의든 아니면 현명한 사람의 마음다스리는 법이든간에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자신을 잘 다루어야 한다는 거예요.『법구경』엔 자신을 잘 다루는 구체적인 방법이 나와요.

 

"눈을 절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귀를 절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코를 절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혀를 절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몸을 절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말을 절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생각을 절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잘 절제하게 되면/ 그는 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난다" (25장 비구품, 인용 출처:http://cafe.daum.net/suu0/1Mll/166?q=%B9%FD%B1%B8%B0%E6%20%C0%FC%B9%AE)

 

한마디로 압축하면 '심신의 절제'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이런 심신의 절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요령은 바로 현수막에 나온 내용대로 하면 돼죠. 물을 끌어들이는 이가 물을 대듯, 활 만드는 사람이 활을 구부리듯, 목공이 나무를 다루듯! (이런, 저의 견강부회한 해석을 대놓고 옳은 것처럼 말했네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물의 이치에 맞게 중용을 지켜서! 물은 순류에 맞게 끌어 들여야 어렵지 않게 끌어 들일 수 있고, 활은 적당한 강도에 맞게 구부려야 부러지지 않게 구부릴 수 있으며, 나무는 재질과 용도에 맞게 다듬어야 재목이 될 수 있죠. 그같이 심신을 절제하면 되는 거죠. 절제는 궁핍이 아니라 중용인 것이죠.

 

뜨거운 여름 밤을 질펀하게 보낸 피서객들, 그들은 과연 제대로 피서를 한 것일까요? 질펀은 궁핍의 또 다른 얼굴이며 이는 절제(중용)와 거리가 먼 것이니, 해답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네요.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調는 言(말씀 언)과 周(두루 주)의 합자예요. 조화를 이루다란 뜻이에요. 言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의사가 잘 통해야 상대와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로요. 周는 음을 담당하면서(주→조)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빠진 부분 없이 두루두루 흡족하게 하는 것이란 의미로요. 고를 조. 위의 현수막에서는 調를 '고르다'란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지만, '길들이다'란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어요. 이 경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라고 할 수 있어요. 대상을 과불급없게 다룬다는 의미로요. 길들일 조. 調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調節(조절), 調攝(조섭)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舟(배 주)와 㕣(沿의 약자, 물따라내려갈 연)의 합자예요. 배란 뜻이에요. 舟로 뜻을 표현했어요. 㕣은 음을 담당하면서(연→선)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물따라내려가는 것이 바로 배란 의미로요. 배 선. 船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艦船(함선), 船尾(선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뿔의 모양을 그린 거예요. 윗 부분은 뿔의 뾰족한 부분을 나머지 부분은 뿔의 외곽과 결을 표현한 거예요. 뿔 각. 角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銳角(예각), 觸角(촉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匚(상자 방)과 斤(도끼 근)의 합자예요. 匚은 가구를 의미하고, 斤은 공구를 의미해요. 공구를 사용하여 가구를 만드는 사람, 즉 목수(장인)란(이란) 의미예요. 장인 장. 匠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匠人(장인), 巨匠(거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知(알 지)와 日(날 일)의 합자예요. 대상을 빠짐없이 고르게 비추는 햇빛처럼 세상사에 대해 두루두루 잘 안다는 의미예요. 슬기 지. 智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智慧(지혜), 智略(지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오늘은 정리 문제 대신 앞의 내용과 관계될 법한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나오는 내용 일부분을 읽어 보도록 하죠. 일종의 피서법인데 '궁핍'에 가까운 피서법이에요. 중용에는 맞지 않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는 '질펀' 피서법 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저도 한 번 따라해 볼 생각입니다 ^ ^;;

 

"8,9년 전이던가, 해인사 소소산방에서 『화엄경 십회향품』을 독송하면서 한여름 무더위를 잊은채 지낸 적이 있다 … 조석으로 장경각에 올라가 업장을 참회하는 예배를 드리고 낮으로는 산방에서 독송을 했었다. 산방이라고는 하지만 방 하나를 간막아 쓰니 협착했다. 서까래가 내다뵈는 조그만 들창과 드나드는 문이 하나밖에 없는 방, 그러니 여름이 아니라도 답답했다. 그래도 저 디오게네스의 통 속보다는 넓다고 자족했었다 … 더러는 목청을 돋구어 읽기도 하고 한자 한자 짚어 가며 묵독하기도 했었다. 비가 올 듯한 무더운 날에는 돌담 밖에 있는 정랑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겨 왔다. 그런 때는 내 몸 안에도 자가용 변소가 있지 않느냐, 사람의 양심이 썪는 냄새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일체가 유심소조니까. 저녁 공양 한 시간쯤 앞두고 자리에서 일어서면 가사 장삼에 땀이 흠뻑 배고 깔았던 방석이 축축히 젖어 있었다. 비로소 덥다는 분별이 고개를 든다. 골짜기로 나가 훨훨 벗어 버리고 시냇물에 잠긴다. 이내 더위가 가시고 심신이 날 듯이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해서 그해 여름 <십회향품>을 10여 회 독송했는데 읽을수록 새롭고 절절했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라면 그렇게 못 했을 것이다. 스스로 우러나서 한 일이라 환희로 충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법정,『무소유』(범우사:1985), 66-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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