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말 서울 문화 재단 남산 센터에서 만화 연수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 때 건물을 드나들면서 복도 쪽 창 너머 건물 외벽에 있는 낯익은 글씨를 자주 보았어요. 70년대 같으면 각별한 보호를 받았을 그 글씨는 관리는 커녕 조만간 철거될 모양인지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더군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였어요. 지금은 어떤 상태로 있는지 궁금하네요.

 

 

박정희 대통령만큼 전국 곳곳에 자신의 서흔(書痕)을 남겨놓은 지도자도 흔치 않을 것 같아요. 한 때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를 찬양까지는 아니래도 독특한 서체라고 추켜 세웠던 적도 있었지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가 많은 것은 그가 집권한 기간이 길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병영사회를 지향한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병영사회는 일사불란한 행동 통일을 필요로 하는데 이때 효율적인 수단이 바로 구호이죠. 곳곳에 박정희 대통령의 구호성 휘호가 많은 것은 바로 여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싶은 거죠. 이런 점은 북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곳곳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구호성 휘호가 널려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잖아요? 우리는 그래도 정권이 바뀌어 박정희 대통령의 구호성 휘호가 철거되거나 가려진데 반해 북한은 여전하죠. 통일된 이후 북한 곳곳에 새겨진 김일성과 김정일의 휘호성 구호는 골치 아픈 처리물이 될 거예요.

 

 

사진은 '대천성공(代天成功)'이라고 읽어요. '하늘을 대신하여 공을 이루다'란 뜻이에요. 감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청도터널 입구에 새겨진 글씨예요. 의미상으로 보아 하늘이 해야 할 어마어마한 일을 해냈다란 찬사인 듯 싶어요.

 

 

그런데 글씨를 쓴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일본군 중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예요. 메이지(明治) 37년(1904)에 쓴 것으로 돼있어요. 대한제국 시절 경부선 철도 부설권을 따낸 일본은 1896~1904 사이 경부선 철도를 놓았는데 청도터널도 그 와중에 완성되었다고 해요. 청도터널은 고지대에 위치하여 만들기가 쉽지 않았기에 '대천성공'이란 글귀를 써놓은 듯 싶어요.

 

 

세월이 지나 이제는 감 와인 숙성지로 변모됐지만 이 청도터널은 돌이켜보기도 힘든 장소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지금처럼 장비가 잘 갖춰진 시대도 철도 놓기가 만만치 않은 고지대이니, 부설 당시야 더없이 어려운 지역이었을테고 이 철도 조성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됐겠어요? 게다가 그 희생이 결코 일인(日人)이 아닌 한인(韓人)일 것이며 보태어 그런 희생으로 이루어낸 성과는 고스란히 일본의 치적으로 돌려졌으니 말이에요(터널위에 순종의 휘호나 우리나라 관리의 휘호가 아닌 일본 군인의 휘호가 걸린 것이 이를 증명하죠).

 

 

휘호를 쳐다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랜 세월이 흐는 지금까지 저 휘호가 걸려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역사의 흔적이니 두고 보자는 것일까요? 아니면 휘호를 건드리면 터널 건축 구성에 악영향이 있기 때문일까요? 지나간 정권의 지도자 서흔도 방치하거나 지우려 하는 판에 쓰라린 상처를 준 상대국의 군인 휘호를 굳이 보관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싶어요. 떼버리고 대신에 터널을 건설하는데 동원됐던 수많은 무명씨들을 기리는 휘호를 써놓든가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써붙이지 않는게 어떨까 싶어요. 이런 생각때문이었을까요? 청도터널 안에서 맛 본 감 와인은 그다지 맛이 없었어요(제 입만만 그랬을 거예요. 다른 시음자들은 다들 좋아하는 표정이었어요).

 

 

代와 功 두 자만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는 人(사람 인)과 弋(문지방 익)의 합자예요. 바꿔 지속시킨다는 의미예요. 人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弋은 음을 담당하면서(익→대)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내외(內外)의 중간점에 있으면서 내외를 이어주는 문지방처럼 내용과 형식을 바꿔 이어준다는 의미로요. 대신할 때. 代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代身(대신), 代理(대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工(장인 공)과 力(힘 력)의 합자예요. 국가에 기여한 지대한 업적이란 뜻이에요. 力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工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工은 본래 자[尺]를 그린 것으로 규준, 법도란 의미가 내포돼 있어요. 여기선 이 의미로 사용됐죠. 국가가 요구하는 일정한 규준과 법도에 맞는 업적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해주고 있어요. 공 공. 功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論功行賞(논공행상), 功績(공적)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정리 문제를 풀어 볼까요?

 

1. 다음 한자를 허벅지에 열심히 연습하시오.

 

   代 대신할 때   功 공 공

 

 

2. (   )안에 들어갈 알맞은 한자를 손바닥에 써 보시오.

 

   (   )理   功(   )

 

 

3. 청도터널에 붙여진 '대천성공'을 대신할 적절한 각자(刻字)가 있으면 소개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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