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릇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영화 '명량' 보셨는지요? 모든 이들이 불가하다는 싸움을 굳이 하려는 이순신에게 아들 회가 묻죠. "아버님은 왜 싸우시는 겁니까?" 이순신은 '의리'때문이라고 답하죠. 회가 다시 묻죠. "아버님의 목숨을 거두려한 임금을 위해서 말입니까?" 그러자 이순신이 답한 것이 바로 위의 내용이에요. 실제 이순신이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임금보다 백성을 더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하니 과히 틀린 대사는 아닐 거예요.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임금의 명령을 어기면 분명 후환이 있을 것임에도 굳이 싸움을 강행한 것은 임금의 안위도 안위지만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하는 뜻이 더 강했던 것일테니까요.
영화 '명량'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왜 돌아간 지 오래 된 이순신을 자꾸 불러내는 것일까? 이제 그만 편히 쉬게 해드려야하지 않나? 생전에도 그렇게 고생을 시켰는데 왜 사후까지 고생을 시켜야 하는 걸까?" 우리 사회의 리더십 부재가 이순신을 자꾸 불러내는 것 아닌가 싶어요.
사진은 이순신이 자신의 전투 강행을 놓고 고뇌하는 장면이에요. 앞에 있는 칼은 그 유명한 문구 "三尺誓天山河動色(삼척서천산하동색) 一揮掃蕩血染山河(일휘소탕혈염산하)"가 새겨진 소품이에요. 그의 의지를 드러낸 소품으로 사용된 것이죠. 그런데 이 좋은(?) 장면에 티가 하나 있어요. 바로 이순신 뒤에 있는 병풍이에요.
이순신의 처소에 있는 병풍 소품엔 충· 효· 인· 의 등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이순신의 자작 작품이던가요. 실제로도 그랬을 것 같구요. 설령 이 두 가지가 아니고 다른 어떤 내용이라 하더라도 불교의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고, 실제로도 그랬을 것 같아요. 그래요, 저 병풍의 내용은 '반야심경'이에요. 허무적 공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반야심경의 내용이 장군에 처소에 놓여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요. 그러니 저 소품은 부적절한 소품이지요. 한자가 적혀있는 병풍이면 아무거나 괜찮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에 실수를 한 것으로 보여요. 제게 딱 걸렸어요! ^ ^
병풍 내용의 전후에 나오는 반야심경 일부분을 알아볼까요? 빨간색 글씨는 사진의 병풍에 나온 내용이에요.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무슨 뜻일까요?
무명이란 실체도 없고 무명이 없어짐이란 것도 없으며 노사도 없고 노사의 소멸이란 것도 없느니라. 고통의 실체도 없고 그 원인도 목표도 방법도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의 실체도 없고 그 깨달음을 얻음도 없느니라.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의 어떤 내용물의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구도자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지혜의 완성에 의해) 마음에 걸림(집착, 항상 할려는 마음)이 없고(머무름이 없이 마음을 낸다)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두려움)가 없으며, 뒤집어진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는 열반(영원한 평안)에 머무느니라(이상 번역 『알기 쉬운 반야심경』(법륜) 269쪽 인용).
이 내용의 핵심 단어는 '반야바라밀다'지요.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Prajna의 음역으로 '지혜, 깨달음'이란 뜻이고 바라밀다(波羅密多)는 산스크리트어 Paramita의 음역으로 '저 언덕에 이르다[到彼岸]'란 뜻이에요. 위 번역에서는 '지혜의 완성'이라고 번역하고 있지요.
반야심경이 이순신의 처소 소품으로 부적절하긴 하지만, 일면 달리 생각하면, 반야심경의 내용과 이순신의 처신이 그리 먼 것 같지는 않아요. 지혜의 완성에 이른 보살이 생사에 초연하듯이 이순신도, 영화에서(실제에서도(?)), 생사에 초연한 모습을 보이니까요. 그렇다면 소품 담당자가 이런 깊은 뜻으로 저 반야심경 병풍을 택한 것일까요? 모를 일입니다. 하하하.
아침 뉴스를 들으니 문제 많은 새경찰청장 임명이 강행됐다고 하더군요. 그 경찰청장은 자신을 선택한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무룻 경찰청장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대통령을 향해야 한다. 대통령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국민이 있는 법이지."
조만간 이순신을 다시 불러내야 할 것 같아요. 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