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업보지~"
한 지인이 남자(편)들이 아내와 자식들한테 제대로 대접 못받거나 황혼 이혼 당하는 현실을 개탄하자 아내되는 분이 한 말이에요. "뭔, 소리여?" "생각해 봐. 그간 여자들과 아이들이 얼마나 남자(편)들에게 억눌려 살았어? 그 댓가를 받는 거지!" "아니, 그건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때지. 우리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샌드위치 신세로 살아왔는데 왜 우리가 그 업보를 받아야 돼? 너무 억울해!" "어쩔 수 없지! 그게 세상 흐름인데... 하여간 업보야. 괜히 그런 일이 생겼겠어?" "..."
사진은 광천의 오서산을 가는 길에 찍은 거예요. 정려각 편액이에요. 읽어 볼까요?
열녀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도정 행 절충장군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유수 처 증 정부인 원주변씨지각
순조 이십일년 임오 명정 철종 팔년 무오 감난공 증직
무슨 내용인지 알아 볼까요?
'열녀'는 설명이 필요 없겠죠? '증'은 사후에 벼슬을 올려주었다는 의미예요.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도정"이 사후에 올라간 벼슬 이름이에요. '가선대부'는 종 2품에게 내리는 봉작으로 직급을 의미해요. 병조참판이 실제 벼슬 이름이죠. '겸'은 겸직했다란 의미예요. '동지의금부사'와 '훈련원도정' 역시 벼슬이름이에요. 이 두 벼슬은 병조참판보다 한 단계 낮은 정 3품의 벼슬이에요. '행'은 품계는 높은데 실제 맡은 벼슬은 그보다 낮은 벼슬을 했을 때 붙이는 명칭이에요. 사후에 벼슬이 올라갔으니 생전에 받았던 벼슬은 낮은 것이 되기에 사용한 것이죠. '절충장군'은 정 3품에 해당하는 무신에게 내리던 봉작이에요.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실제 벼슬 이름이죠. '이유수'는 정려각 주인공의 남편 이름이에요. '처'는 설명이 필요없겠죠? '증'은, 앞서 말한대로, 사후에 직급을 올렸을 때 사용하는 명칭이에요. 여기서는 남편의 직급이 올라갔기에 아내되는 이의 명칭도 올라간 것을 말해 주지요. '정부인'은 종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이의 아내를 부르는 명칭이에요. 이유수라는 분이 생전에는 정 3품의 벼슬을 지냈기에, 이에 준하면, '숙부인'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사후 남편의 벼슬이 올라갔기에 '정부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죠. '원주변씨지각'은 원주 변씨의 정려각이란 의미예요. 이하 내용은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군요. 아, '명정'과 '감난공 증직'이란 말은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명정'은 임금의 명으로 정려각을 세우게 됐다는 의미이고, '감난공 증직'은 국가의 어려운 일 -- 여기서는 홍경래의 난을 의미 -- 을 해결한 공으로 벼슬을 올려 받게 됐다는 의미예요. 이유수는 생전에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지만 인정을 못받았고 사후에 재평가돼 공로를 인정받았지요.
정려각의 실제 주인공은 원주 변씨인데 편액의 내용은 원주 변씨보다 남편에 관한 내용이 훨씬 더 많아요. 주인공께서 좀 섭섭하실 것 같아요. (아, 이것도 한 시대의 흐름이니 그런 마음이 안드실라나요?)
그런데 이런 정려각의 편액으로는 원주 변씨가 어떠한 분이었는지 알 길이 없지요? 아무런 느낌도 없구요. 설명판을 읽어야 비로소 이 분의 체취를 맡고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설명판의 일부 내용을 읽어 볼까요?
원주 변씨는 길주목사 변성화의 맏딸로, 전라좌수사 이유수의(1769 ~1821)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원주 변씨는 1787년(정조 11) 여름에 길주 목사로 근무하던 부친 성화의 병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게 하여 생명을 3일간 연장시켰다. 부친이 사망하자 변씨는 3년 상을 지낼 장성한 아들이 없어 맏딸로서 시댁의 허락을 받아 묘 앞에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지냈다.
1811년(순 11) 겨울에 남편 이유수를 따라 숙천 임지에 있을 때, 홍경래의 봉기로 주변 여러 고을이 함락되었으나, 상경 중인 남편을 대신해 관군을 이끌며 큰 공을 세웠다 한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남편 이유수가 신병의 악화로 고항에 돌아오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피와 살을 고아서 먹이는 등의 지극한 간호를 하였으나 끝내 운명하였다. 이에 변씨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비상을 마시고 남편을 따라 사망하였고, 부부의 장례를 함께 거행하였다고 한다.
편액만 읽었을 때 하고는 확실히 차이가 있죠? 어떤 체취와 느낌이 드시는지요? 분명한 건 이 분이 평범한 여인은 아니라는 걸 거예요. 아버지와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눈물겨운 일들도 일들이지만 무엇보다도 남편을 대신하여 관군을 이끌었다는데에서 그런 면모를 느낄 수 있어요. 생사의 문제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호연지기를 가졌던 분인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까지 읽어도 아직은 이 원주 변씨라는 분이 그렇게 실감있게(?) 와닿지 않지요? 자, 그러면 제가 설명판에서 숨겨 놓았던 부분을 소개해 볼게요. 그러면 정말 이 분에 대해서 실감있게 느끼실 거예요.
(원주 변씨의) 큰 딸은 안동 김안근과 결혼하여 병하 병연 형제를 두었으니, 원주 변씨는 김병연, 즉 김삿갓의 외조모가 된다.
이제는 좀 실감있게 느껴지시지 않나요? 김삿갓의 외조모, 그 분이 바로 원주 변씨였어요! 김삿갓의 기세(棄世, 세상을 버림)는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죠. 그가 그런 일을 하게 된 데에는 직접적으로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할아버지를 과장(科場)에서 매도했던 충격에 기인하지만 간접적으로는 외할머니의 기상을 물려받은데에서도 기인하지 않았나 싶어요. 충격을 받았다고 아무나 기세하진 않으니까요.
정려문이나 정려각은, 주지하는 바처럼, 유교 이념을 장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된 것이죠. 조선 시대에 와서 널리 퍼졌지만 거슬러는 삼국 시대까지 올라간다고 해요. 한 남편을 사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더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죠. 지고지순한 사랑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장려될 일은 결코 아닌 것 같아요. 유교의 비조인 공자께서는 인형을 무덤에 묻은 자들을 저주하며 "(그들에겐) 후손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어요. 사람의 현상을 한 인형조차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했다면 산 사람의 목숨은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유교는 본시 생명을 더없이 존중하는 이념이에요. 이런 이념이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 전화되면서 남성 중심 국가 중심으로 왜곡되어 부질없이(?) 효자 충신 열녀를 양산한 것이지요. 효자 충신 열녀의 행동은 그 나름으로 아름답지만, 이들의 행동을 결코 보편화시킬 순 없어요. 그것은 삶[생명]이라는 본질적 가치를 역행한 일들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 원주 변씨라는 분의 정려각을 보면서 슬픈 마음이 들었어요. 왜곡된 이데올로기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여인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살아서 더 아름다운 삶을 구현할 순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더군요.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려보죠. 남자(편)들의 시세가 한없이 추락하는 것이 업보라는 지인 아내분의 의견은, 제가 보기엔, 과히 틀리지 않은 견해예요. 한쪽으로 기울어졌던 것이 제자리를 찾는 과정이라고나 할까요? 남자(편)들의 시세는 아마도 지속적으로 떨어질 거예요. 그러다 어느 시점에 가면 균형을 잡겠지요. 아, 그 시점이 언제가 될까요? 제 자식의 손자쯤 가면 균형이 잡히지 않을까요?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까지 권위를 누렸으니(그 이전 세대는 계산하지 말구요). 불쌍한 남자(편)들~ (저도 남자(편)입니다. ㅠㅠ)
위 편액의 핵심 한자는 烈, 旌, 閭예요. 좀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죠.
烈은 火(불 화)와 列(벌일 렬)의 합자예요. 불이 맹렬히 타오른다는 의미예요. 火로 뜻을 표현했지요. 列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불이 맹렬히 타오르면 이로 인해 물체들이 불에 타서 망가지고 이리저리 흩어지게 된다는 의미로요. 세찰 렬. 烈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烈火(열화), 激烈(격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旌은 깃대 위에 이우(犛牛, 검은 소)의 꼬리를 달고 이것을 새털로 장식한 기예요. 生은 음을 담당하고(생→정) 나머지 부분은 뜻을 담당해요. 기 정. 旌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旌竿(정간, 깃대), 旌鼓(정고, 기와 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旌閭(정려)의 旌은 먼 곳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이고, 閭는 마을이라는 의미예요. 따라서 旌閭란 마을에서 잘 알아 볼 수 있게 설치한 시설물이란 의미예요. 그것이 문의 형태이면 정려문이라 하고, 집의 형태면 정려각이라고 하지요. 정려의 대상은 열녀, 효자, 충신 등이에요.
閭는 門(문 문)과 呂(등뼈 려)의 합자예요.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문이란 의미예요. 門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呂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마을 문 안에 있는 가구들은 마치 등뼈가 이어져있는 것처럼 죽 이어져 있다는 의미로요. 이문 려. 閭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閭閻(여염, 민간), 閭巷(여항, 민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정리 문제를 풀어 볼까요?
1. 다음의 한자를 허벅지에 열심히 연습하시오.
烈 세찰 렬 旌 기 정 閭 이문 려
2. ( )안에 들어갈 알맞은 한자를 손바닥에 써 보시오.
( )竿 ( )巷 激( )
3. 남녀(부부)간 화목하게 지내기 위한 제 1 덕목을 말해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