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사지(廢寺址)에 가보셨나요?
모든 것은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겪기 마련이죠. 폐사지는 고(枯)와 쇠(衰)에 해당하는 증표일 거예요. 한때 번성했던 것들이 시들은 자취만 남기고 있는 폐사지는 찾는 이들에게 기쁨보다는 슬픔을 안겨주죠. 출발보다는 종점을 먼저 생각하게 하고, 같은 선상에서 삶 보다는 죽음을 먼저 생각하게 하죠. 그리 즐거운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것은 분명해요. 그러나 모든 것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관된 것임을 생각할 때 종점은 곧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고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고 볼수도 있을 거예요. 이런 생각으로 폐사지를 찾으면 그저 슬픈 감정만 들지는 않을 것 같아요. 슬픔 속에서 새로운 기쁨을 찾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주말 모처럼만에 주변을 벗어나 보령을 갔는데, 간 김에 성주사지(聖住寺址)를 찾았어요. 통일신라말 선문구산(禪門九山)중의 하나였고 2대에 걸쳐 왕사를 지낸 무염(無染)대사가 주석했던 곳인데 지금은,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잡초만 무성해요. 당시의 융성했던 성주사의 위세(?)를 보여주는 것은 무염대사의 추모비 뿐예요.
무염대사 추모비의 정확한 명칭은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예요. 대사 입적 후 2년 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1,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웅장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요. 비문을 지은이는 최치원 선생이고 글씨를 쓴 이는 최인곤 선생이예요. 이 비는 최치원 선생의 사산비명(四山碑銘)중의 하나로 고대사 특히 통일 신라 말기를 연구하는데 귀한 자료가 되고 있지요.
무염대사의 추모비에서 제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구절은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기는 하나 몸이 또한 마땅히 마음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心雖是身主 身要作心師)"였어요. 모든 것을 마음으로 귀결짓는 일반적인 불교의 가르침과 다른 말이기 때문에 관심이 가더군요. 더구나 대사가 선문구산의 한 파를 열었던 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의외이기까지 하구요. 이런 의외의 내용은 대사의 다른 말에도 나와요. "교 · 선이 같지 않다고 하는데 나는 그 다르다는 종지를 보지 못했다.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것이고 나는 알지 못하는 바이다(敎禪爲無同 吾未見其宗 語本黟頤 非吾所知)." 대사가 구산선문의 일파를 열었기에 선종만 중시하고 교종을 경시했을 거라는 것은 막연한 선입관이에요. 대사는 결코 어느 일방만을 강조하지 않았어요. 그랬기에 심 · 신을 보는 관점도 어느 일방만을 강조하지 않고 양자의 조화를 강조했던 거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대사의 말을 읽으니 생각은 절로 폐사지를 찾을 때의 느낌으로 연결되고 이는 다시 대사의 말을 변주하게 만들더군요. "종점은 곧 새로운 출발지이고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의 출발일 수 있다. 선종이 곧 교종이며 교종이 곧 선종이다. 몸이 곧 마음이며 마음이 곧 몸이다." 폐사지에서 성근 선입견을 떨치고 새로운 배움을 얻었어요. 이 역시 슬픔 속에서 기쁨을 얻은 것이라고 각색하여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성주사는 본래 오합사(烏合寺)란 이름으로 불렸던 백제의 절이었는데 신라의 삼국통일후 폐사가 됐다가 무염대사가 주석하면서 성주사란 이름으로 개명하게 됐어요. 성주(聖住)란 의미는 성스런 인물이 인연따라 머물게 됐다란 의미예요. 문성왕(文聖王)이 하사한 이름으로 전해져요.
※ 위에서 나온 비문의 원문과 해석은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에서 인용했어요. 해당 자료를 읽고 비석의 원문과 대조해 보려 했는데 도저히 불가능(?)하더군요. 글씨가 너무 잔데다가 뚜렷하지 않아서요. 이러다보니 해당 인용구에 해당하는 사진도 찍을 수가 없었어요.
오늘은 위에서 등장했던 한자 중 가장 낯선 한자인 黟와 頤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黟는 果(과실 과)와 多(많을 다)의 합자예요.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과실처럼 기물(器物)이 많다는 의미예요. 많을 과. 黟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夥多(과다, 꽤 많음), 夥計(과계, 동업 혹은 상가의 회계 주임이란 의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頤는 '턱'을 의미하는 글자예요. 본래 왼쪽에 있는 글자만으로 뜻을 표현했는데 후에 頁(머리 혈)이 추가되었죠. 턱은 머리 부분에 있다는 의미로요. 頁 왼쪽에 있는 글자를 좀 상세히 알아 보죠. 이 글자는 턱이 있는 뺨 부분을 측면에서 그린 거예요. ㄷ은 뺨을 그린 것이고,. 오른 쪽의 돌출 부분은 광대뼈를 그린 것이며, 중간의 ㅣ는 광대뼈 밑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표시한 거예요. 턱 이. '어조사 이'로도 많이 사용해요. 이 경우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어조사란 말을 돕는 말이란 뜻인데 턱은 씹는 것을 도와주는 부위이기에 이런 의미로 연역된 것이죠. 위 글 ― 語本黟頤 ― 에서도 '어조사 이'로 사용됐어요. 頤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頤使(이사, 턱으로 부린다는 뜻으로 남을 마음대로 부림을 이름), 頤和園(이화원, 서태후의 여름 별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정리 문제를 풀어 볼까요?
1. 다음의 한자를 허벅지에 열심히 연습하시오.
黟 많을 다 頤 턱 이. 어조사 이
2. ( )안에 들어갈 알맞은 한자를 손바닥에 써 보시오.
( )使 ( )多
3. 다음을 읽고 풀이해 보시오.
心雖是身主 身要作心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