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에서 배웠던 인물의 흔적을 생활 주변에서 만나는 느낌은 TV에서 보던 유명인을 실물로 만났을 때의 느낌과 흡사하지 않을까?
신경준(申景濬, 1712-1781). 학교 다닐 때 '실학자이며 '강계고'의 저자'로 배웠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 이가 서산에 군수로 재임했었고 그를 기리는 '영세불망비'가 동네 산인 물래산에 있다. 놀랍고 설레지 않겠는가.
처음 이 비를 본 건 수년 전. 이번에 태안 해변 길 도보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면서 문득 다시 보고 싶어 찾았다(위 사진). 처음의 느낌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놀랍고 설레었다. 아쉬운 건 돌아보는 이 아무도 없어 방치돼 있는 것. 사진에는 글자가 거의 안 보이는데 저 마애 영세불망비에는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군수 신후경준 영세불망비 건륭이십팔년(郡守 申侯景濬 永世不忘碑 乾隆二十八年).
건륭이십팔년은 서기로 1763년 영조 39년이다. 자료를 찾아보면 신경준은 서기로 1762년 영조 38년에 서산에 부임한 것으로 돼있다. 그러면 1년이나 1년이 채 안되게 서산에 재임했던 것. 치적을 남기기에는 극히 짧은 기간 재임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세불망비가 있다는 건 그의 감화가 적지 않았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수의 그럴듯한 영세불망비가 대개 반강제적으로 세워졌던 것에 비하면 저 초라한 마애 영세불망비는 진심에서 우러나 새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 아래에는 젯상으로 사용된 돌도 있어 이런 추정에 더욱 힘을 보탠다.
유명인과 악수를 나눈 손은 왠지 보물 단지 같아 씻지도 않고 수건으로 감싸기도 한다. 저 마애 영세불망비도 그 같은 대접을 받았으면 좋겠다.
사족. 고전번역원에 들어가 신경준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신경준이 1762년 영조 27년 서산에 부임했다고 나온다(아래 사진). 그런데 이현종이 펴낸 '동양연표'를 보면 1762년은 영조 38년이고 중국은 고종 27년이라고 나온다. 고전번역원에서 고종 27년을 영조 27년으로 잘못 표기한 것 같다. 몸통 글에선 '동양연표'를 따라 1762년 영조 38년에 부임했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