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일 금요일


노곤한 몸을 일으켰다. 물 한 잔을 마시고 시계를 본다. 6. 좀 늦게 일어났다. 갑자기 무반주 첼로를 켜고 싶다. 기왕 켜는 거 세게 한 번. ~! 앱을 켜고 정읍 버스터미널에서 진안 마이산까지의 경로를 누르니, 기대하지 않은 엉뚱한 내용이 나온다. “출발지와 도착지 간의 직선거리가 50km 이내인 경우만 도보 길찾기를 제공합니다.” 걸어가긴 불가능한 거리란 말씀이다. 그러면, 버스로는 얼마 걸릴까? 버스로 경로를 누르니, 4시간 18분이라고 나온다(중간 텀을 빼고 실제 시간은 3시간 30분가량 걸렸다. 네이버 지도 앱의 내용이 절대적인 내용은 아니다). 경유지를 보니, 광주 장계 진안으로 돼 있다. 광주, 세 번씩이나 들리게 되네? 거 참. 카스테라와 초코 우유로 아침을 먹었다(어떤 이는 일어나서 바로 뭐 먹기가 불편하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불편하지 않다. 그게 밥이 됐든, 빵이 됐든, 고기가 됐든. 아침을 꼭 먹는 습관이 있어서 그렇지 않은가 싶다). 아침 제반 의식을 끝내고(이제고문진보읽기는 아침 의식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남들에게 선비 운운의 소리를 들어, 나는 내가 공부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 아니올시다인 것을 절감했다. 내가 나를 몰랐던 것이다), 모텔을 나섰다.


8시 조금 넘어 광주행 버스를 탔다. 1시간 정도 걸려 광주에 도착, 아니 중간 하차했다. 터미널에서 안 내리고 시내 어중간한 데서 내렸다. 넘들이 다 내리니 내려야 하나 보다 생각하고 내린 것. 넘들은 굳이 터미널까지 갈 필요가 없어 편리하게 시내 어중간한 데서 내려줄 때 내린 것인데, 이 등신이 그것도 모르고 그냥 따라 내린 것이다. 예상하지 않았던 광주 시내 짧은 관광을 마치고 터미널에 도착(‘길찾기앱으로 효험을 못 봐, 끝내 어떤 멋진 분한테 터미널을 물어 도착할 수 있었다. 하여간, 방향 감각은).


장계 가는 버스 시간을 보니 11시 넘어서 밖에 없다.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잘됐다, 터미널 구경도 하고 이른 점심도 먹자! 터미널 시설물들은 거기가 거기인지라, 여기도 특별한 것은 없는데...아니,특별한 것 하나가 눈에 띄었다. 길고양이를 보살펴 달라는 대형 화보. 애처로운 눈빛의 고양이를 중앙에 놓고 좌우로 부탁의 메시지가 띠처럼 둘려있다. “길에서 태어났지만 우리의 이웃입니다.” 고양이 밑에 1/10 정도 크기의 글씨로 부연 메시지가 쓰여 있다. “어떤 환영도 없이 태어나 누구 배웅도 없이 떠나는 삶, 길고양이 함께 살아요. 살고 있어요.” 하단엔 깨알 같은 글씨로 후원자 명단이 쓰여 있다. 생명의 도시, 광주에 어울리는 화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외곽에서 접했던 불쾌했던 경험이 일거에 사라지고, 다시 광주에 대한 애정이 샘 솟는다. 아이 러브 유, 광주! (하여간, 변덕 하곤.) 그럴듯한 식당들이 눈에 보이는데, 우리네에겐 그저 백반이 최고. 1만 원 내외의 저가(?) 메뉴가 즐비한 식당가에서 순두부찌개 백반을 시켜 먹었다. 나오면서 가급적 현금 결제 부탁 드립니다란 애처로운 호소문을 써놓은 식당을 봤다. 카드 수수료 때문일 터. 뭐 떼고 뭐 떼면 남는 게 없으니 저럴 것이다. 후유~. ‘편리라는 카드 결제 뒤에 숨은 수탈이란 그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가급적 소액은 현금 결제해 주는 게 좋다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어 조금 전 식당에서도 현금 결제를 했다)?



어찌어찌하야 진안에 도착했다. 2시가 좀 넘었다. 마이산까지 어떻게 가야 하나? 앱을 켜 살펴보니, 13km3시간 21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2시가 넘어가는데 산까지 3시간 이상이 걸리면, 5시가 넘어 도착하는데, 입산할 수 있을까? 살짝 고민된다. 그렇다고 벌써 숙소를 잡고 들어갈 수도 없고. 버스 시간을 보니 차도 많지 않고, 앱으로 살펴보니 최적 시간이 1시간 50분 걸린다고 나온다. 고민이 된다. 택시를 한 번 타보자. 택시 기사에게 마이산 가는데 얼마냐니, 시큰둥하다. 저기 택시 기사한테 물어보란다. 아니, 이건 뭔 시츄에이션? ‘그냥 걸어가자.’ 생각하고 혹시?’ 하는 마음에 택시 옆 모종 판매를 하는 젊은 주인한테 여기서 마이산까지 얼마 걸리냐니, 놀라운(!) 대답을 해준다. 40분 걸린단다. 40분이면 4~5km밖에 안 되는 거리이다. 택시로 간다면 4분여 정도 걸릴 거리.아니, 이게 뭔 일이다냐! 앱이 가르쳐 준 거 하고 너무 차이가 나지 않어? 어떻게 된 거지? 젊은 주인은 현지 사람이니 이 주인의 말이 맞을 것이다. 횡재한 기분이면서도 약간 떨떠름하다. 젊은 주인에게 고개를 130° 정도 숙여 깊은 감사를 표하고, 주인이 덧붙여 안내해 준 경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택시 기사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 , 불친절하기는. 댁이야 짜증 나는 질문이었겠지만 낯선 사람에겐 간절한 질문이었는데 좀 친절하게 말해주면 어디 덧나시나?


버스로 1시간 50분 걸릴 거리를(돌고 돌아가며 사람을 내리고 태워주니 그럴 것이다) 축지법을 사용하야 40분 만에 주파, 마이산 입구에 도달했다. 오다가 중간에 에덴 모텔이란 데를 찜 찍어 놓았다. 하산하여 인근에서 저녁 먹으면 딱 들어가기 좋은 시간대에 있는 모텔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에덴이라니. 오늘은 태초의 천국에서 잠을 자게 됐다. 이브까지 있으면 좋으련만, 그건 과한 기대이다(이따 말하겠지만, 이 에덴은 하느님의 노여움을 받아 아담과 이브가 쫓겨나기 직전의 에덴이었다).



마이산은 세 번째이다. 대학교 때 한 번 왔고, 근처를 차로 지나면서 한 번 봤고, 이번에 또 오게 된 것. 앞의 두 번은 진지하지 않은 겉핥기 방문이라고 봐도 좋다. 이번은 진국을 맛보리라! 등산로를 잘 정비해 놓아 오르기가 편하다. 7시간 도보 후 명산 월출산까지 일거에 오른 건각(健脚)에겐 너무너무 편한 등산로였다. 정상. 말의 귀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마이산(馬耳山). 한쪽은 숫, 한쪽은 암마이산으로 부른다. 둘 다 오르기는 불가하여 한쪽만 올랐다. 어느 쪽으로 올랐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그런데, 이 마이산, 멀리서 볼 때와는 완전 딴판인 산이다. 멀리서 볼 때는 나무와 풀들이 푸른 것처럼 보였는데, 아니다. 거무튀튀한 돌산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셰익스피어가 말했다는데, 그이는 이런 원경과 근경의 다른 풍경을 보고 그것을 인생에 대입시켜 말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원경과 근경이 너무 딴판이라, 의외를 넘어 놀랍기까지 하다.



산을 내려가 마이산의 그 유명한 돌탑을 보러 간다. 보면 볼수록 신비한 탑이다. 어이 저렇게 쌓아 올렸으며, 어이 저렇게 버틸 수 있단 말인가. 뭔가 과학적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저것을 쌓은 이갑룡 도사는 순전히 영감에 의지해 돌탑을 쌓았을 터, 인간의 신비로운 능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사람들이 붐빈다. 어떤 외국인 내외를 안내하는 한 가이드가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한다. 어렵지 않죠! 그런데 이 외국인 내외, 포즈를 취하면서 잠시 뽀뽀를 한다. 워매, 남살시려운 거. 그런 건 밤에나 허고, 이 신성한 장소에선 좀 삼가셔! 가이드 양반, 그런 주의사항도 얘기 안 해준 겨. 그럼, 내가. 그건 주제 파악 못 하는 거고. 살짝 마뜩잖은 기분으로 사진을 찍어 줬다. 외국인 내외가 사진을 확인하더니,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원더풀~’이라고 한다. 그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먼. 그나저나 앞으로 한국 유명 사찰 같은 데를 다닐 때는 함부로 뽀뽀하지 말어(마음속으로 훈계했다)!



다시 반대로 마이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내려가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가야겠다. 산 정상에서 탑사로 내려올 때는 힘들지 않았는데, 다시 올라가려니 좀 힘에 부친다. 시선을 들어 데크 계단을 올려다 보니 까마득하다. 이럴 때 방법은 위를 보는 게 아니라 발밑만 보는 것이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선다. 목표 달성도 그렇지 않을까? 목표만 쳐다보면 아득해 보인다. 그러나 계획을 세우고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목표에 도달해 있다. 정상에 올랐다. 다시 하산 길. 하산이야 쉽지~. 그래도 방심은 금물. 다리가 풀려 자칫하다간 등산 시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 목표 달성 후 방심하다 일거에 성취한 결과를 다 잃어버리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지 않던가. 되먹잖은 개똥철학에 취해 혼자 흐뭇해하며 발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다시 산 초입에 도착했다. 5시가 다 돼간다. 입구에 가위 박물관이 있다. 뭔가 산과 조합이 잘 맞지 않는다. 그냥 갈까 하다 무료라는 말이 있어 잠깐 들렸다. 출입구에 있던 안내하시는 분이 마감시간인데...” 하면서 보고 가라고 한다. 땡큐~. 세상에, 가위가 이렇게 다종다양했던가! 서양 동양 우리나라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다종다양한 가위가 전시돼 있다. 누가 이런 컬렉션을 했을까, 그냥 지나쳤으면 너무 아쉬울 뻔했다. 인형 작가인 아내에게 가위는 필수품. 아내에게 선물이 될까 싶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리고 박물관을 나왔다.

하산하여 얼마 안 가니 음식점들이 있는데, 불은 훤하지만, 파장 분위기다. 한 음식점에 들어가 표고버섯 영양밥을 시켰다. 그런데 나온 밥은 무늬만 표고버섯 영양밥이었다. 표고버섯이 3개 은행이 2개 들어 있었다. 애고, 이나마 먹을 수 있는 게 어디냐. 배고픈 김에 맛있게 먹었다. , 이제 에덴동산으로 가보자.



에덴 모텔에 도착했는데, 외관이 영 아니올시다다. 순창에서 숙박했던 멘하탄보다 더하다. 줄지어 나오는 뻘건색 문자 광고에는 최상의 서비스 최고의 시설이라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요란한 빈 수레 광고 같다. 그나저나 묵기로 작정했으니. 안내실에 방을 달라니 5만 원이란다. ~! 5만 원? 금요일이라, 관광지 바가지성 요금을 감안한다 해도, 이건 영 아니다. 5천 원 깎자니, “내일 전국 노래자랑이 있어 방값이.” 하는데 영 자신 없어 하는 말투다. 자신도 자신의 숙소 처지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옳거니, 틈이 보이는구나. 약한 자에겐 한없이 강한 영악하고 사악한 본성이 불끈 일어난다. “그래도, 좀 깎아 주셔요!” 주인이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45천 원만 내셔요.” 한다. 승리!


방으로 올라가는데, 지금 그 문구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외국인 근로 노동자들에게 뭔가를 당부하는 문구가 붙어있다. 그렇구나. 여기는 관광객보다, 흔히 망해가는 모텔이 마지막으로 밟는 수순 월방 있어요를 내거는 그런 수준의 모텔이구나. 여기서 무슨 태초의 천국을 맛볼 수 있으랴. 어이쿠, 이놈의 안목하곤. 방에 들어가니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시설이 낡은 것은 당연, 기본적으로 모텔에 있는 커피포트도 없고(그런데 봉지 커피는 있었다), TV도 나오지 않았다(나오게 해달라고 부탁할까 하다 그만뒀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성애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그래도 다행히 물 두 병은 있었다). 한 마디로 꽝이었다. 어찌할 것인가. 어찌하긴 뭘 어쪄! 그냥 머무는 거지. 예의 마음 한쪽에서 음양론 철학이 고개를 든다. ‘이 사람아, 커피포트 없으니 봉지 커피 안 먹어도 되고, TV 안 나오니 음심에 휘둘릴 필요 없고 좀 좋아. 수양한다 생각하고 그냥 하룻밤 잘 묵어. 이브는 꿈속에서 만나고.’ 샤워를 하고 제반 저녁 의식 행사를 마친 뒤 8시가 못 되어 과감히 잠을 청했다. 내일은 무주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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