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일 월요일


눈을 떠, 시계를 보니 5시다. 조금 더 잘까 하다 벌떡 일어섰다. 자꾸, 게을러지면 안 돼! 세수만 할까 하다, 정신도 차릴 겸 1만 원 더 낸 뽕도 뽑을 겸 샤워를 했다. 룰루랄라~. 누룽지와 모닝빵 미니 소시지 딸기 약간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안 먹기로 결심한 봉지 커피를 한 잔 타 먹었다. 갑자기 힘이 불끈 솟는다. 누군가 당신 왜 학교를 나왔소?”하고 물으면 커피 먹기 싫어서요!”라고 답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카페인에 취약하다 보니, 수업하기 힘들 때 어쩌다 커피 한 잔을 먹으면 기분이 업되어 수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갈수록 마시는 횟수가 늘어났다. 내성이 생긴 것이다. 이러다 폐인 되겠다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누구는 봉지 커피 말고 원두커피를 먹으라고 권했는데, 내겐 그게 그거였다). 그런 원흉인 봉지 커피를 노곤한 여행을 핑계 삼아 한잔 먹은 것이다. 근데, 왜 이렇게 맛있냐! 마약쟁이들이 이래서 마약을 못 끊나보다.


6. 어질러 놓았던 주변을 간단히 정리하고 출입문을 나섰다. 1층 입구에서 스위치를 누르니 차단막이 스르륵 올라간다. 다른 곳을 보니 다 차단막이 내려져 있다. 밤새 힘들게들 놀은가 보구먼. 그나저나 오늘은 월요일인데, 웬 무인텔에 손님이 저리 많은겨. 경제가 어렵다는데, 없는 이들만 어렵지, 있는 놈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구먼. 뭐여, 그럼 나도 있는 놈인가? 그렇지 않은겨? , 연금이 그럭저럭 한 달 생활할 만큼은 나오니, 있는 놈 아녀? 내년부터는 마누라도 얼마 안 되지만 연금 받으니 더 보태질 테고. 그렇긴 하네~. 어디 가서 연금 얘긴 절대 하덜 말어! 괜스레 위화감 생겨! 맞어! 근신해야지~.


알싸한 새벽 공기를 한가득 들이켰다 내뱉어 본다. 시원하다! 네이버 지도 앱을 켜고 월출산에서 나주 버스터미널까지 길찾기를 누르니 33Km에 도보로 8시간 33분 걸린다고 나온다. 버스터미널을 종착지로 정한 건 그 근처에 숙소가 많을 것 같아서였다. , 출발~!


오랜만에(?) 차량 통행이 적은 길을 걷는다. 조용한 길을 걸으니 마음이 넉넉하다(여행 중반 이후 알게 된건데, 네이버 지도 앱에서는 도보 안내 시 차량 통행이 적은 길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앱에서 대충 경로만 파악하고 나머지는 도로 이정표를 보면서 걸었다. 자연 차량 통행이 많은 길을 걷게 되었고, 불필요한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바보~).


삼나무가 울창한 교문이 눈에 띈다. 그런데, 폐교된 초등학교다. 우와, 저렇게 큰 삼나무라면 학교 연수가 상당할 텐데. 예전에는 수많은 학생이 저기서 재잘거리며 놀았겠지? 최재천 교수는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안 하고 애를 안 낳는 것에 대해 지구 전체로 봤을 때 아주 훌륭한 적응행위라고 말한다. 생태상 호모사피엔스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면서 감소하는 인구 문제는 이민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말한다. 인구 감소를 걱정하는 지방이나 국가 입장에서 봤을 때는 뺨 맞을 소리이나, 대국적 견지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역시 현실감은 떨어진다. 전국시대에 등장했던 겸애주의와 비슷한 주장이라고나 할까? 결국은 넉넉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해야 인구가 증가할 터인데,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은 어려운 일이라, 우리나라의 인구 문제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이 사람이 또 무거운 생각을 하고 있네! 하여간, 선생 티는.



잠시 뒤를 쳐다보니 어제 올랐던 월출산이 보인다. 아침의 월출산 풍경을 하나 찍어본다. 어제는 진짜 무리했다. 등산만도 하루 일정인데, 7시간 이상을 걷고 등산까지 했으니. 그래도 탈 없이 일정을 소화한 것을 보면, 내 지구력이 그리 허술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하.



금정면 연보리를 지나는데 ‘6.25 희생자 위령탑이 서 있다. 그런데 제대로 돌보지 않아 횡뎅그레하다. 사진을 찍고 위령탑 문구를 읽어 보았다.



고이 고이 잠드소서! /그 모든 한 풀고 편히 잠드소서! /무심한 조국 원망일랑 이제 접으시고/ 화합과 평화의 기틀 다졌으니/ 진실규명과 화해를 논하고/ 늦게나마 /이토록 긴 세월 구천을 헤매게 하였습니까?/ 누가 당신들에게 굴레 씌워/ 구천을 떠도는 억울한 영혼이여!/ 평범하디 평범한 민초일 뿐/ 서로 아끼고 보살피며 살아가는/내 부모 내 새끼 내 형님 내 동생/ 이념 사상 그딴 거 모릅니다./ 그저 민족분단에 따른 희생자일 뿐/ 당신들은 좌익도 우익도 아니었습니다./구천을 떠도는 억울한 영혼이여!/ 위령탑을 세웁니다/ 여기 학살의 땅 금정면 연보리에/ 이제야 속죄하는 마음으로/반세기 넘도록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오다/속으로 속으로 삭이며/ 분노와 슬픔/ 살아남은 자의 한 또한 그대들 못지않아/이제 고이 잠드소서/구천을 떠도는 억울한 영혼이여!


6.25 당시 애꿎게 희생된 민간인들을 위해 세운 탑인 듯하다(문구가 살짝 어색하다). 우리 사회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극심한 좌우 이념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그 이념은 모두 국가와 민족을 표방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들의 이념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데 그 이념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킨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닐까? 6.25 당시 애꿎게 희생된 민간인들은 그 전도된 주객의 본보기이다. 사람을 살리는 이념이어야 진정한 이념이지, 사람을 죽이는 이념이라면 그것은 폐기되어야 할 이념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적대시하지 말고 만나 서로의 편견을 확인하고 진정 국가와 민족을 위한 합의점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좌익이요, 우익 아닐까? 최근 굥의 행보를 보면 극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극우, 좋아,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생각 가진 이들을 함부로 대하면 안돼지! , 제발 만나서 대화 좀 하셔~. 그러고보니, 오늘이 4.3 희생자 추념일일세?


길옆에 폐가가 보인다. 간이 승강장 맞은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매표소였던 것 같다. 한때는 저기서 사람들이 갖가지 화제를 꽃피웠을 텐데. 괜스레 착잡함이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튼다.



콘크리트 옹벽에 스프레이로 써놓은 광고문이 눈에 띈다. “벌초의 달인 양범석 010-8468-3695.” 오래전부터 제기돼 온 묘지 문제가 떠오른다. 저런 광고는 벌초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벌초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은 묘지 관리가 힘들다는 말이다. 부모님 산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는 나도 내 자식에겐 이 일을 맡기고 싶지 않다. 이런 심정이 어디 나만 그럴까? 앞으로 묘지는 이런저런 형식으로 바뀌다가 종국엔 모두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 또 울울한 생각. 이보게, 하늘을 좀 봐! 하늘이 푸러! 오매, 그렇네! 울울한 기분이 눈 녹듯 사라진다.



조합장 당선 축하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오면서 이런 플래카드 많이 봤다. 서산서도 봤고. 3월에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가 있었나 보다. 농협이 정말 거대한 조직이란 걸 이번 여행에서 실감했다. 면 단위마다 있는 농협 '하나로 마트''농협 은행'. 우리나라에서 어떤 조직이 이런 거대한 조직을 갖고 있나? 거대한 만큼 파워 또한 막강할 터, 조합장의 위상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저렇게 축하 플래카드를 붙이는 거겠지. 그런데 농협이 그 거대한 크기만큼 애초의 목적대로 농민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비근한 예를 실감한 적이 있다. 동네 한 분이 고구마 농사를 지어 농협 공판장에 내갔는데(최상품으로), 속된 말로 똥값을 받았다고 했다. 농협은 농민들 것을 헐값에 사들여 소비자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자신들의 조직만을 배불리고 있는 것이다. 과장된 혹평일까? 애고, 또 무거운 생각. 이거 왜 이렇게 무거운 생각만 안겨주는 것들이 많은 겨?



갑자기 화사한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환한 배꽃! 배꽃 바다다! 서산 집 마당에도 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꽃이 피었을까? 가도 가도 왕십리가 아니고, 배밭이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 나주네? 나주면 배의 고장 아녀? 그래서 저리 배꽃 천지구먼~.



어느덧 나주 시내 입구로 들어서는 영산대교를 건넌다. 오매, 여기는 유채꽃 바다네! 꽃을 좋아하는 처를 위해 사진 한 장 찰칵. 다리 끝 지점에 벌꿀 호텔이란 건물이 보인다. 중저가 호텔이란 광고도 달아 놓았다. 호텔 이름이 재미있다. 저기서 자면 꿀맛 같은 잠을 잘 수 있나 보다. 중저가라니, 더 마음에 든다. 그러고 보니 숙소를 정해야 하는데, 일단 종착지로 정한 버스터미널까지 가보자.



그런데 중도에 버스터미널까지 가기를 포기했다.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아까 본 벌꿀을 비롯해 벌써 군데군데 모텔 간판이 보였기 때문. 역시 시()라 다르긴 다르군. ‘벌꿀을 지나쳐 얼마간 가다 롯데 마트가 있어 잠깐 들려 간식거리를 사고, 이른 저녁을 위해 포장된 초밥도 샀다. 점심을 거른 탓에 배가 고파 롯데 마트를 나와 인근의 정자에서 포장 초밥을 먹었다. 왜 이리 꿀맛이냐~.


, 이제 숙소를 정해야는데, 그렇지, 아까 그 벌꿀에 가보자. 꿀맛 같은 식사를 했으니 잠도 꿀맛같이 자야 어울리지 않겄어? 다만 중저가라고 했지만, 명색이 호텔인데, 가격이 어떨까 살짝 걱정되네? ‘벌꿀에 들어가 가격을 물으니 4만 원이란다. 오매 좋은 거! 주인 아주머니 인상이 선하다. 자전거 여행을 오셨냐고 묻기에 도보 여행이라고 답하며, 약간 비굴하고 처량한 표정으로 혹시 현금 내면 좀 깎아주시나요?” 했더니, 밝게 웃으며 “5천 원 깎아 드리죠.” 한다. 오매 좋은 거! 인상이 선하시니, 마음도 선하시네. 방에 들어갔더니, 호텔 급은 아니고, 모텔 급이다. 이름만 호텔을 사용하는 것 같다. 어제 잤던 윙 무인텔에 비하면 규모나 시설은 떨어지지만 나름 깔끔하다.


샤워하고 빨래를 빨아 널은 뒤 TV를 켰다.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는데, ‘삼국지가 나오는 채널이 있다. 어디 좀 볼까? 유비가 제갈량과 형주를 차지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연합군이었던 오나라의 주유는 위나라 군대와 대치 중인데, 그 틈을 노려 형주를 차지하자는 제갈량의 의견에 유비가 고민하는 것이다. 결국, 유비는 군사(軍師)가 알아서 하라며 자리를 뜬다. 결과적으로 제갈량의 명에 따라 조자룡이 형주를 접수하는데. 뒤늦게 형주를 접수하러 온 주유가 이를 보고 유비에게 이를 간다. “X자식, 겉으로는 성인군자인 체하고 뒤로는 호박씨를 까다니(내 식으로 바꿔 표현했다).” 결과적으로 유비는 이 형주를 얻었기에 천하 삼분지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만약 제갈량이 없었다면 그의 성품상 형주를 차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가 마음은 있으나 눈치와 명분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에 늘 해결사로 나선다. 그것도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는 진짜 물과 물고기의 관계였던 것이다. 제갈량은 주군을 위한 신하가 되기보다 자신을 위한 주군을 만나길 원했는데, 그런 그에게 유비는 제격인 인물이었다. 정도전과 이성계도 그런 관계 아니었을까? 이방원이 유선(유비의 아들)같은 어리석은 존재여서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면, 조선의 역사는 이후의 역사 전개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아니, 뭐여, 시방 그딴 거 생각하지 말고 푹 쉬고 내일을 생각해야지! 맞어~!


가족 단톡방에 5신을 띄우고, 억지로(!) 고문진보한 소금을 읽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8. 내일은 담양까지 간다. 비 소식이 있어, 살짝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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