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일 토요일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고 손목시계를 보니, 새벽 4시다. 조금 더 누워있을까 하다 벌떡 일어섰다. 어제 애초 계획(6시간 정도) 보다 곱절 더 걸어 몸이 무거웠지만 6시 전에 출발하려면 일어나야 했다. 조금만 더, 하다가 늦거나 낭패를 본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온수를 쓸 수 있지만 일부러 차가운 물로 세수하고, 물에 불린 누룽지와 미니 소시지 그리고 사과 한 알로 아침 식사를 했다. 네이버 지도 앱을 켜고 강진읍까지 '길찾기'를 누르니 25km에 도보로 6시간 23분 걸린다고 나온다. 그런데 경로 중간쯤 노정을 얼마간 벗어난 곳에 '다산초당'이란 이름이 보인다. , 여기에 '다산초당'. 잘됐네, 이참에 한 번 들려보자.

  

오늘 목적지를 강진읍으로 정한 것에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도보여행을 생각하며 참고한 최안나 할머니의 국토 종단기 내 나이가 어때서?에 나온 3일 차 지점이 강진읍이기 때문일 뿐.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어제 일정도 마찬가지였고, 앞으로의 일정도 마찬가지이다. 할머니의 노정을 그대로 따른 것은 내 나이가 할머니의 나이에 근접해 걷는 거리가 참작할 만하고 별도의 노선을 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돼서였다. 남이 걸은 길을 그대로 걷는 것이 낡은 느낌이긴 하나, 남이 걸은 길을 걷는다 해도 느낌과 생각은 다를 터이니, 크게 게의 할 일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국토 종단기는 큰 용기를 주었는데, 할머니도 한 국토 종단 도보 여행을 그보다 젊은 남자인 내가 왜 못하랴 싶었다. 할머니,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그나저나 강진읍에 들어가면 최소한 어제처럼 숙박지를 구하지 못해 애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후 나는 읍, 군에서만 숙박지를 정했다. 면 단위에서는 숙박지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한 번은 면 단위에서 숙박지를 구해 좋아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다. 할머니는 이따금 면 단위에서 주무시기도 했는데, 당시(2005)만 해도 면 단위 모텔이 성업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지금은 코로나19 여파로 면 단위 모텔들은 영업이 안 돼 폐쇄된 곳이 많다.)

  

봉투에 3만 원을 넣고 짤막한 감사 문구를 적은 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전날 목사님께서 비용은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더구나 노숙할 뻔했는데, 최소한의 감사 표시는 해야지! 주변 정리를 하고고문진보』「이소경을 한 소금 읽은 뒤 교육관을 나섰다. 여행 중 읽으려고 고문진보를 준비해 왔는데, 여행 중반까지는 그럭저럭 읽다가 이후는 내팽개쳤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어디 가려면 꼭 공부할 것을 챙기는데(결국은 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그 격이다.

  

새벽 어스름에 길을 나서니, 약간 센치한 느낌이 든다. 가로등 불빛 뒤의 종탑이 운치 있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실제와 다른 작품 사진이 나왔다. 실제는 가로등 불빛을 제외하곤 전부 침침한 색인데, 사진을 찍고 보니 하늘은 푸르스름한 색으로, 가로등은 옅은 검은색으로, 가로등은 밝은 노란색으로 나와 이른 새벽에 느끼는 서늘함과 맑음을 잘 표현한 작품 사진이 나온 것이다. 센치한 느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으로 재현해 놓은 느낌이다. 이런 게 사진예술인가? 사기치곤 참으로 아름다운 사기다!




전날처럼 경로를 찾기 위해 네이버 지도 앱을 켤 필요는 없었다. 큰길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 조금 걷다 보니 해가 뜨며 주변이 환해진다. 더불어 새벽 어스름의 센치했던 기분도 말끔히 걷힌다. 하늘을 가르며 나는 비행기가 있어, 사진을 찍었다. 고려 때 강일용이란 이가 백로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푸른 산허리를 날며 가르네 [飛割碧山腰]”란 표현을 했는데, 창공에 비행기가 남겨놓은 자국은 그야말로 푸른 하늘을 반으로 갈라놓은 모습이다.

 

 


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설치한 태양광 시설들이 자주 눈에 띈다. 학교를 나오기 전 동료 한 분이 자기 남편이 퇴직 후 수입거리로 태양광 시설을 설치했다고 자랑삼아(?)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 저런 시설 중 상당수가 그분과 같은 목적에서 설치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설치한 것이 너무 눈에 거슬린다. 앞서 땅끝마을 전망대에서 느꼈던 이물질 같은 느낌이다(눈에 거슬리는 태양광 시설은 이후에도 많이 봤다. 농촌 청년단체에서 태양광 시설 설치를 반대하는 플래카드를 본 적도 있다. 객지 사람도 태양광 시설 설치에 부정적 느낌이 드는데 현지 분들은 오죽할까 싶다. 천연전기 생산과 경제 수익이란 명목도 좋지만, 뭔가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신전면을 지나는데 초등학교 건물이 보인다. 학교를 나온 지 얼마 안 돼 그런지, 학교 건물을 보면 애틋한 느낌이 든다. 초등학교 학령인구가 급감하고 있는데, 여기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구호가 보인다. "꿈을 향해 도전하는 학교." 괜스레 헛웃음이 나온다. 아니, 꿈을 향해 도전하는 건 학생이지, 웬 학교? 그리고 꿈과 도전이란 말도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꿈은 추구하는 이상이지, 당장 싸워 쟁취해야 할 목표가 아니잖은가. '다 함께 아름다운 꿈을 꾸는 학교'라고 하면 어땠을까? 별론가? 구호는 행동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나름의 의미가 있다. 힘을 주기 때문. 그런데 그냥 어쩔 수 없이 만든 구호에선 그런 효과가 나기 어렵다. 많은 수의 학교 구호가 그렇다고 하면, 지나친 혹평일까? 차라리 구호를 없앴으면 좋겠는데, 굳이 필요하다면 소수 인원이 탁상에서 만들지 말고 구성원의 중지를 모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도로변의 쓰레기들이 자꾸 눈에 거슬린다(오늘 본 것들은 그래도 양반이다. 여행 중에 본 쓰레기에는 별별 것이 다 있었는데, 텔레비전과 냉장고도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당신의 양심을 버리는 것입니다유의 구호를 많이 접하지만, 돈 앞에 양심을 줘버린 지 오래인 우리 사회에서 그런 구호로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제도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쉽지 않아 보이고. 근원적으로는 소비를 줄여야 하는데, 상품 생산과 소비를 기본 동력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 해결책은? 나도 모르겠다! (이번 여행에서 노변의 쓰레기를 하도 많이 보다 보니 쓰레기 문제 해결책을 절로 생각하게 됐는데, 답은 없었다. 다만 이런 생각은 했다. 그것이 문제인 것은 인지하되, 부정적인 면모에 골몰하지 말고 긍정적인 면모를 생각해 보자는 것. 그래야 뭔가 해결책이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니 쓰레기를 두고 긍정적인 면모를 생각해 보자니, 뭔 정신 나간 소리여? 그렇긴 해, 하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한참을 걷는데 왼쪽으로 보이는 산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높은 봉우리가 연달아 펼쳐지는데 정상 부분이 모두 날 선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대한 병풍을 펼쳐놓은 느낌이다. 네이버 지도 앱을 켜니 주작산(朱雀山)이라고 나온다. 전설의 새 주작이 나는 듯한 느낌이라 그렇게 붙인 모양이다. 주작은 본디 남방을 담당하는 새이니, 해남 지역의 수호신 격으로 그렇게 붙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 시간이 허락된다면 한번 올라보고 싶은 산이다.

 

 

 

쌀값 시위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다 올랐는데 쌀값만 떨어졌다! 한 공기 쌀값 300원 보장! 생산비 폭등 보전!” 작년 11월 서울 상경 시위를 독려키 위해 붙였던 플래카드다. 굥의 개정 양곡관리법거부권 행사가 확실시된다는데, 농민들 마음이 쓰릴 것 같다(45일에 굥은 예상대로 개정 양곡관리법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13일 국회에서 이 법안은 최종 부결됐다). 굥은 후보 시절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미 양곡관리법 기준에 따라 시장격리 요건이 충족됐다며 문재인 정부에 30만 톤의 쌀 시장격리를 요구했었다. 또한 농민의 애타는 심정을 외면하지 말고 정부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까지 밝힌 적이 있다. 말 뒤집기는 정치인의 특기라지만, 굥의 말 뒤집기는 그가 내세운 공정과 상식에 너무도 반하기에 반감이 더 심하다. 그나저나 굥은 뭘 알고 그런 주장을 내세웠고, 지금도 뭘 알고나 거부권을 행사한 건지?

 

 

 

강진 두레농요비라는 것이 눈에 띈다. 두레농요를 발굴 복원한 이종재라는 분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어울러 보세 어울러 보세

상사 소리를 어울러 보세

먼데 사람은 듣기도 좋고

곁에 사람은 보기도 좋게

앞산은 점점 멀어지고

뒷산은 점점 가까오네

닷 말 내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구나

~에헤루 상사뒤여

 

 

 

 

홍대용의 대동풍요서(大東風謠序)’를 보면 민요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천진(天眞, 순수한 마음)이 발현된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대부의 고상한 한시보다 민요가 더 훌륭하다는 말인데, 사실 민요에 대한 고평가는 공자에게서부터 시작된 동양의 오래된 문학 전통이다. 그가 엮었다는 시경의 내용 중 상당수가 바로 민요이다. 공자는 천진이라는 말 대신에 사무사(思毋邪)’란 말을 사용했다. 이런 민요에 대한 가치를 홍대용은 재인식한 것뿐이다. 문학사가들은 이를 상층부 문학과 하층부 문학의 만남으로 평가하는데, 문학사의 흐름으로 본다면 그런 평가가 맞을 듯싶다. 민요를 중시하는 오래된 문학 전통이 있었지만, 실제 문학의 주류는 상층부의 한시문이었고, 하층부의 민요와는 교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요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묘하게 트롯공연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트롯계 테리우스 유지광! 소멸되는가 싶었던 트롯이 어린(?) 가수들에 의해 되살아나는 걸 보면 트롯은 변형된 민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질긴 생명력도 그렇고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노래라는 점에서도. 8일 공연이라는데, 적막하던 시골이 모처럼 활기를 띨 것 같다.


 

 


다산초당이 점점 가까워온다. 주차장에 들어섰다. 오잉, 다산초당은 한참 더 올라가야 하네? 주차장 근처에 다산박물관이 있어 잠시 들렸다. 이것저것 전시는 해놨는데, 그다지 볼만한 게 없다. 강진이 다산의 오랜 유배지가 돼서 유명지가 됐을 뿐 그의 근거지는 아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눈에 띄는 전시물이 있어 사진을 하나 찍었다. 과표. 과거 합격자들의 답안지 모음이란다. 일종의 수험서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접했던, ‘고입 ㅇ년간 총정리이런 거와 비슷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이 있는 한 수험서가 있기는 매한가지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 답안 모음 속에 다산의 답안도 있어 전시해 놓은 것이다. 글쎄, 이게 다산박물관과 뭐 그리 깊은 관련이 있어서... 이곳의 전시물이 대개 이런 수준이다. 거기다 영인자료도 많고. 이러니 외관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볼만한 게 별로 없다.

 

 

 

박물관을 나와 다산초당에 갔다. 생각보다 꽤 한참 간다. 드디어 다산초당! 그런데, 초당이라면서 웬 기와집? 해설사분에게 물으니, 관리가 어려워 기와를 올렸단다. 중국에서도 두보의 초당을 너무 거대하게 만들어 그 정취를 느끼기 어렵게 해 놨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다산초당도 이와 비슷한 격이다. 기와집에서 어떻게 초당의 정취를 느끼겠는가! 초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이 있는데, 왼쪽은 제자들이 담론 하며 공부하던 곳이고, 오른쪽은 다산의 집필실이라고 한다. 모두 소박하다. 당시에는 더 소박했을 것 같다. 그나저나 난 최근에 조동일 교수의 다산에 대한 평을 듣고 깜짝 놀랐다. 비판적인 이야기였는데, 유배지에서 2천여 권의 서책을 갖추고 제자들이 올리는 좋은(?) 음식을 먹으며 거기에 수발을 들고 잠자리도 같이한 여인을 두고 생활했는데, 무슨 유배라고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더욱 근본적인 다산의 결함은 기왕에 유배당했으면 썩은 서책을 버리고 자연에서 새로운 사유를 할 수 있었는데, 과거(過去)에 얽매여 그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산의 방대한 저술이란 게 선유(先儒)의 잡다한 글을 모은 뒤 자신의 의견을 살짝 단 것뿐인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혹평을 한 것이다. 어디서 들어본 일 없고 생각해 본 일 없는 말이어서 깜짝 놀랐다. 박정희 대통령이 과거 일본 관동군 출신이며 한 때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다거나, 만해 한용운이 총독부에 대처승 제도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사람이고 사물이고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처 몰랐던 다른 면 때문에 그를 굳이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균형 있게 보면 될 뿐이다. 무조건 칭송도 무조건 비판도 옳은 것은 아니다.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이고, 다만 어느 면의 비중이 더 크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다산이 자기 형님이 유배된 곳을 바라보았을 것으로 짐작된 곳에 지어진 정자(현대에 들어서 지은 것)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다. ~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정자 한쪽에 앉아 배낭을 내려놓고 수선했다. 배낭 한쪽이 찢어졌기 때문. 오랫동안 쓰지 않은 데다 짐을 무리하게 넣고 힘들게 지퍼를 채웠더니 이음매 부분들이 견디지 못하고 터진 것이다. 주변의 끈으로 이리저리 묶어 대충 건사를 하였다. 건사를 하는 중 어떤 스키니 차림의 얼굴 하얀 예쁘장한 아가씨가 정자에 올라오더니 떡하니 중앙에 앉아 바다를 쳐다보며 바나나를 까먹는다. 우리 나이대의 여인네면 살짝 조심스럽게 와서 비켜 앉거나 여럿이 떠들썩하게 와서 앉을 텐데... 약간 당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잘못한 건 아니지만, 그냥 좀 정서상 잘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슬그머니 정자를 내려왔다. 그런데 왠지 싱그런 느낌도 든다. 어허, 이 사람이. 정신 차리게!

 

다산초당 뒤편으로 다산과 교류가 있었다는 초의선사가 주석했던 백련사를 찾았다. 동백꽃이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대충 둘러보고 주차장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백련사 동백꽃 길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모양이 예뻐서가 아니라, 안내 문구가 특별해서 그렇다. 통상 보는 밋밋한 안내문이 아니고 문학적 감수성이 가미된 정감 가는 안내문이다.

 

"백련사 동백나무숲은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이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길목에 약 5.2ha 면적에 동백나무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그 중간중간에 보이는 아득하고 아늑한 바다 풍경은 숨 막힐 듯 아름답다. 이 길은 다산과 초의선사가 교류하던 사색의 숲이며 철학의 숲이고 구도의 숲이다. 이곳 백련사의 동백은 2월부터 머금어 초봄인 3월 초부터 개화하기 시작하여 3월 말에 낙화한다. 백련사 사적비에는 아름다운 숲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 문인 성임과 임억령의 시에서도 지은이가 백련사 동백나무 숲의 뛰어난 경치를 직접 보지 못해 한스럽다는 내용이 담겨져있다. 동백나무 숲을 즐길 때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어야 한다. 붉은 동백꽃들이 뚝뚝 떨어진 붉은 숲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면 더욱 조용히 가슴으로 꽃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공무원들의 머리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안내문이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의뢰하여 얻은 안내문이 아닐까 싶다.

  

백련사 주차장을 나와 다시 강진읍으로 향하여 걸으려는데 배가 고프다. 도로 옆의 간이 승강장에서 누룽지와 연양갱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드디어 강진읍 초입. 그런데 저 멀리 흉물스러운 것이 보인다. 산 한 면을 청자 형태로 드러냈는데, 흡사 살 발라낸 뼈를 보는 느낌이다. 강진이 청자요(靑瓷窯)의 고장이란 것 보여주려 한 모양인데, 난 질겁부터 했다. 뭣이다냐, 저게! 아니 저런 거 없으면 강진이 청자요의 고장이란 거 누가 모르나. 요즘 앱이 얼마나 잘 발달돼 있는데 저딴 것을 만들어 자연을 훼손하는 거여! 오늘은 영 일진이 안 좋다.

 

 


강진읍에 들어섰다. 오후 3. 배낭을 하나 사고 일찌감치 숙소를 잡은 뒤 이른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갔는데, 시간이 애매해 먹을 곳이 없다. 앱에서 맛집으로 소개된 보리밥집을 찾아갔더니 5시에 오픈한다고 써 붙여 놓았다.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시장 끝에 있는 도로를 건너 하나로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산 뒤 천천히 걸어(5시에 맞추려고) 보리밥집을 다시 찾아갔더니, “재료 소진. 오늘 영업 끝. 내일 봬요.”라고 써 붙여 놓았다. 이런 낭패가! 맞은편에 칼국수 집이 있어 혹 식사할 수 있냐고 물으니, 안된단다(보통 음식점은 오후 2시에서 5시까지가 휴식 시간이다. 6시부터 본격 저녁 시간. 이번 여행에서 처음 알았다. 점심은 오전 11~오후 1시가 성시. 물론 대도시는 다를 것 같다. 면과 읍 단위에서는 그랬다). 할 수 없지~. 숙소로 들어와 불린 누룽지와 빵 그리고 사과로 저녁을 대신했다.

  

이곳 숙소 이름은 모란 모텔인데, 일찍 들어올 수 있어서 선택한 곳이다. 모텔은 보통 5시 이후 숙박 손님을 받는다. 숙박비는 4만 원을 줬다. 주말이니, 비싼 편은 아니다. 그런데 싼 값을 하느라고 그런지, 시설이 노후돼 있고 방음 시설도 안 좋아 새벽녘까지 바깥과 옆방에서 나오는 소음이 심했다. 덕분에, 잠을 설쳤다.

 

양말과 속옷을 빨아 널고 잠바 속에 입었던 스포츠 셔츠도 빨아 널었다(이번 여행에서 집을 나설 때는 눈썹도 떼고 나오라.”는 말을 실감했다. 빤스 한 장도 번거롭게 느껴진 것. 불필요한(?) 짐들을 중간에 택배로 집에 부칠까 생각도 했다가 혹시 몰라 계속 갖고 다녔는데, 역시나였다).

  

가족 단톡방에 3신을 올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월출산까지 간다. 애고, 옆방 손님들, 조금만 조용히 하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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