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일 목요일

 

마침내 출발했다. 530, 집을 나섰다. 1시간 40분 걸어서 서산 버스터미널에 도착, 815분 광주행 버스를 탔다. 나이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뜬금없는 국토 종단 도보 여행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좀 어이가 없다. 아내에게는 '구도(求道) 여행'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 개구라다. '그냥' 나선 것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냥'도 하나의 명분이다. 목숨이 붙어있으니 '그냥' 사는 것처럼, 사지(四肢) 움직일 수 있으니 '그냥' 길을 떠나보는 것이다. 물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울 수는 있다. 내가 태어난 이 땅을 끝에서 끝까지 한번 걸어보고 싶다, 퇴직 이후의 삶을 그려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세상 물정을 경험하고 싶다 등등. 그러나 역시 개구라다. '그냥'이 정답이다. '그냥'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숭고한 명분이다. 아닌가?

  

장기 여행을 위해서는 시간, 건강, 비용, 가족의 후원이 필요한데, 이번 도보 여행엔 이 모든 것이 완비되었다. 특히 가족의 심적 후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내의 전폭적인 응원, 군대 간 아들과 해외에 있는 딸의 격려. , 내가 그간 헛살지는 않았군!

  

버스가 광주에 들어선다. 광주에 들어설 때는 항상 숙연한 마음이 든다. 피로써 지켜낸 민주화의 성지이니 그런 마음이 어이 아니 들지 않으랴. 광주에서 땅끝마을 가는 버스를 찾으니, 없다! 오잉? 터미널에서 안내 서비스를 하는 분에게 물으니, 직통이 한 대 있는데 이미 갔고, 해남에 가서 갈아타면 된단다. 아이고, 고마워라!

 

해남 터미널에서 키오스크로 차표를 끊지 못해 당황해하는 노인분을 도와드렸다. 매표소가 옆에 있는데, 키오스크를 이용해 달라는 문구를 써 붙여 놓았다. 매표소를 폐쇄하고 키오스크를 설치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노인은 얼마 전까지도 매표소를 이용해 표를 끊었던 듯싶다. 이 노인 같은 경우가 얼마간 계속 나타나겠지? 이런 경우를 '문화 지체' 현상이라고 했던가? 급격히 자동화되는 시대에 스트레스받는 노인들이 많으실 것 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연세 많으신 분들은 어떠실꼬?

  

땅끝마을에 도착했다. 245. , 여기가 한반도의 끝이란 말인가!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별반 없다. 땅끝 표지석이 있는 곳을 향했다. 날씨가 흐려서 바다 전망이 그리 선명하지는 않다. 중간중간 꽃망울을 터뜨린 벚나무들이 보인다. 여행을 마칠 때쯤엔, 벚꽃이 다 졌겠지? 땅끝 표지석이 있는 곳에 도착하니, 보수 공사를 하고 있다. 일하시는 분께, 송구한 마음으로, 사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드렸다. "바쁘면 안 찍는디, 다행히." 위세를 부리며 사진을 찍어준다. , 그럴 수 있지. 누구는 뼈 빠지게 일하는데, 누구는 놀러 다니고. 여하간 찍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돌아 나오는 길에 땅끝 전망대에 올랐다. 매표소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오지 않았으면 입장료를 내야 한단다. 아이고, 오나가나 이놈의 입장료 타령. 과한 비용(1천 원)은 아니지만 약간 떨떠름한 마음으로 입장료를 내고 전망대에 올랐다. 남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날이 흐려 그다지 큰 감흥이 일지 않는다. 지자체마다 조금 이름 있는 곳에 전망대 세우는 게 유행인 듯싶다. 개인적으론, 그다지 호감 가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땅끝마을 산 정상에 서면 절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데, 굳이 이물질 같은 전망대를 세우고 또 거기로 이동하는 모노레일을 설치할 필요가 있을까? 자연 훼손이 과도하다. 관광이란 명목으로 인공물을 설치하는 것에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약간 이른 저녁을 먹고, 6시쯤 '푸른 모텔'에 들어갔다. 한 민박 주인이 소개해 준 곳이다. 그 민박에 머물려고 했는데, 예약이 차서 불가하다며 이곳을 소개해줬다. 침대방이 4만 원, 온돌방이 3만 원이란다. 당연히 온돌방이쥐! 야한 영상물을 좀 볼까 하고 채널을 여기저기 눌러보는데, 안 나온다. 이 사람아, 정신 차리게!

  

가족 단톡방에 1일 보고를 하고 속옷을 빨아 넌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8. 내일은 해남 남창까지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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