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그 정(情)을 말한 것이다. 말로 나타낸 정을 다듬어 글로 표현한 것을 시가(詩歌)라 한다. 노래 중에서 최고의 노래는 기교를 부리지 않고 선악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스럽게 천기(天機)를 드러낸 것이다. 시경의 국풍(國風)은 대부분 마을과 골목에서 불려진 것들이나 마음을 순화시키고 그릇된 정치를 풍자하려는 뜻이 있었다. 이들 노래는 요순시대의 노래처럼 진선진미(盡善盡美)하지는 않으나 올바른 성정에서 나온 것으로 평가받았다. 때문에 각 나라에서 이를 채집해 올린 뒤 태사(太師)의 선별을 거쳐 가락을 덧붙여 궁중의 연회에 사용됐고, 더불어 공부하는 선비들과 전야(田野)에서 일하는 백성들도 함께 부르고 즐겼다. 하여 모두 그 노래를 부르고 즐기면서 자신도 모르게 선한 마음을 배양했으니, 이것이 바로 시교(詩敎)였다.  

   

그런데 주나라 이래로 화이(華夷)가 뒤섞이고 방언(方言)이 날로 달라졌으며 풍속도 부박해지고 사특함도 늘어났다. 방언이 달라지면서 시가(詩歌)의 체제(體制)도 달라졌고, 풍속이 부박해지고 사특함이 늘어나면서 정(情)과 글도 상응하지 않게 되었다. 때문에 성률(聲律)과 격조는 날로 세련되고 고상해졌지만 그럴수록 자연스러움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글의 이치(理致) 또한 바르게 보이긴 했지만 천기와는 점점 더 거리가 있게 되었다. 이러하니 그러한 노래를 가지고 시경의 풍아(風雅)를 이어 나라를 교화하려 한들 될 수 있었겠는가! 


이항(里巷)의 노래는 자연스러운 가락에서 나온 것들로 그 박자는 비록 화이의 차이는 있으나 노랫말 대부분은 그 풍속의 사정(邪正)에서 나온 것인바, 대상에 감응하여 말로 표현된 점에 있어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지금의 음악이 옛 음악과 다를 바 없다”는 맹자의 말 그대로인 것이다. 그러나 그 노랫말들이 옛것을 본받지 않고 사리(詞理)가 비속하여 나라에서 채집하지 아니하였고 태사도 이를 도외시해 천자에게 올리지 않았다. 때문에 후세에 치란득실(治亂得失)의 자취를 상고할 수 없게 됐으니, 시교(詩敎)는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동방의 이족(夷族)이다. 기풍이 편협하고 성음(聲音)도 좋지 않아 시율(詩律)의 공교함은 애초부터 찾을 수가 없다. 노래라는 것은 모두 상스러운 말에다 간혹 문자(文字)가 섞여 있는 정도로, 옛것을 좋아하는 사대부들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 무시했기에, 대부분 우부우부(愚夫愚婦)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하여 군자들은 이를 제대로 평가하거나 취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저 시경의 풍이라는 것은 바로 민간에서 통상적으로 얘기되던 것을 노래로 읊은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 당시 그 노래를 들은 것이 지금 사람이 지금 민간에서 불려지는 노래를 듣는 것과 똑같다 할 수 있다! 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비록 그 노래들이 입으로 소리 내어 박자를 맞춘 형편없는 것들이지만 그 말들은 모두 충심(衷心)에서 나와 이리저리 억지로 짜 맞춘 것이 아닌 천진(天眞)이 발로된 것이라고. 나무꾼의 노래나 농부들의 노래 또한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왔기에 이들의 노래도 저 사대부들의 이리저리 퇴고하여 그 말은 옛것을 본받았으나 천기는 잃어버린 작품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자가 그 노랫말이나 가락의 천근함에 매몰되지 않고 마음으로 그 노래의 진의를 살필 수 있다면 백성들의 선한 마음을 진작시키고 풍속을 순후하게 만드는데 쓸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예와 이제의 차이가 있겠는가! 또 그 노랫말에서 비유를 쓰고 흥(興)을 사용하며 시대를 아파하고 옛날을 생각하는 것은 간혹 현인 군자의 입에서 나온 것도 있을 것인즉 그 충군애상(忠君愛上)의 뜻은 말이 끝나도 여운이 남을 것이다. 이런 것은 시경 풍아(風雅)의 유지(遺旨)를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 말은 천근하면서도 분명하고 그 뜻은 자연스러우면서 분명히 드러나 아녀자들도 그것을 들으면 노래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위아래에 두루 통하는 시교에 적합하니, 이는 결코 버려둘 바가 아니다.     


삼가 예부터 지금까지 전해오던 것을 채집하여 2책으로 만들어 『대동풍요(大東風謠)』라 이름하니, 천여 편이 된다. 또 별곡(別曲) 수십 수를 그 뒤에 함께 붙여 태사의 선별을 기다린다. 이를 취한다면 성스런 조정에서 민간의 풍속을 살피려는 정사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시가의 내용 중 다소 외설스러운 것이 있는데, 공자께서도 음란한 노래라 평가받는 정나라와 위나라의 시들을 제거하지 않은 것과 같은 취지로 그대로 두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또한 주자도 그런 시들을 통해 반성하며 권선징악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고 언급했던 바를 상기하면 좋을 것 같다. 윗자리에 있는 이들은 더더욱 알아야 할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대동풍요서(大東風謠序)』이다. 홍대용은 실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선진적 식견을 견지했던 이라고 할 수 있다. 위 글에서도 그런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사대부들의 고상한 한시 대신 민간 가요에 주목한 점이 그것이다. 시대의 흐름과 민간의 사정을 알 수 있는 노래를 음풍농월의 한시보다 높게 본 것은 지금봐도 확실히 선진적인 식견이었다 평할 만 하다.

 

그런데 이를 홍대용만의 탁월한 식견이라고 보는 것은 성급한 평가이다. 민간의 가요를 중시한 것은 동아시아의 오래된 문학 전통이기 때문이다. 위 서문에 보이는 '천기'라는 언급도 유의해야 할 점이다. 마치 홍대용만의 독특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는 공자 이래의 전통적 시관(詩觀)인 ‘사무사(思無邪)’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 홍대용의 언급에서 특별히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우리말로 된 노래―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이 여기에는 나타나있지 않다. 어떤 이는 시조라고도 하는데, 민요가 아닐까 한다 ―의 의미 정당성을 언급할 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역외춘추(域外春秋)' 주장과 마찬가지로 자주성에 방점을 찍고 있는 언급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다른 실학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혁신적인(?) 언급은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정치로 귀결되던 시대에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주장은 그것이 아무리 혁신적인 것이라 해도 당대에는 빛을 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비록 역사적으로는 높이 평가될 수 있어도 말이다.


오늘날은 노래로 민간의 의사를 살필 필요는 없는 시대이다. 여론을 살필 수 있는 다양한 경로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다들 걱정하듯이, 그 여론이 조작 가능한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정치하는 이들이 여론에 귀를 닫아서는 안될 것이고, 더욱더 귀를 기울여 세심하고 현명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홍대용도 노랫말과 가락의 천근함에 얽매이지 말고 노래에 담긴 의미를 잘 살피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론을 잘 살피려면 살피는 자의 수양(修養)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늘날은 위정자의 수양이 과거보다 더 요구되는 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의 위정자들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대동풍요(大東風謠)』는 아쉽게도 현재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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