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의사 한 분이 안타깝게 돌아가셨다. 서울 시장 박원순. 대의(大醫)는 세상을 치료하는 이라 했다. 평생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애써 온 분이니 그를 의사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듯 자신의 아픔도 치유하면 될 터인데, 성급히 생명을 버린 것이 너무 안타깝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대의도 자신의 아픔은 치유할 줄 몰랐던가 보다.
그의 죽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맹자가 말했듯, 죽음은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는 것보다 더 싫은 것도 있기에 때로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기도 한다. 박원순 시장에게 그것은 신뢰와 명예의 상실이었을 것이다. 그 무엇인가가 그것을 송두리째 잃게 했기에 기꺼이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그래도 안타깝다. 정작 죽어야 할 자들은 끝까지 살아, 그것도 떵떵거리며 사는 것과 대조하면 더더욱 그렇다.
사진은 ‘제생의세(濟生醫世)’라고 읽는다. 문구 밑에 나온 것처럼 ‘일체의 생령을 도탄으로부터 건지고 병든 세상을 구원한다’는 의미이다. 원불교의 종지(宗旨)로, 불교의 자비나 유교의 인 기독교의 사랑과 같은 유의 말이지만,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함유한 특징이 있다. 상기(上記) 종지들은 주로 정신적 구원에 치중되어 있지만, 제생의세는 물질과 정신의 구원 양면을 지향하고 있는 것. 제(濟)는 물질적 구원, 의(醫)는 정신적 구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교조(敎祖)들의 모습에서도 차이점을 보인다. 상기 종지를 내건 교조들은 포교를 우선했지만, 원불교의 교조 박중빈은 포교보다 간척지 개간을 우선했다. 정신적 구원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서가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는 물질적 구원이 더 시급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질적 구원을 정신적 구원에 비겨 결코 낮게 보지 않은 특별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재생의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행복한 세상일 터이다. 그것은 확실히 대의의 일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는 소의(小醫)도 대의와 다를 바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세상을 이루는 것이니, 한 사람을 치유한다는 것은 곧 세상을 치유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불교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것도 바로 이런 취지에서일 터이다(사진은 원불교 계통 제약회사에서 만든 약 포장지에서 찍은 것이다).
아주대 외상치료센터 소장이었던 이국종 교수는 의대생들이 외과를 기피한다는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다. 힘들고 보수도 적기 때문이라는 것. 많은 의대생이 상대적으로 덜 힘들고 보수도 많은 성형외과 쪽을 선호한다고 한다. 의사도 사람이니 덜 힘들고 더 많이 얻는 것을 싫어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의사마저 일반인과 똑같이 덜 힘들고 더 많이 얻는 것을 선호한다면 우리 사회는 행복한 세상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은 치료하기 쉬운 병보다 치료하기 어려운 병을 치료할 때 더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의대생들이 자신이 하는 일은 결코 한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치유하는 것이라는 점을 크게 깨달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