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승과 제자가 길을 가고 있었다. 중간에 내를 건너지 못해 발을 구르는 여인네를 만났다. 스승은 덥석 그 여인네를 안아 내를 건네 주었다. 제자는 뜨악한 눈으로 스승을 바라 보았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제자가 스승에게 항의조로 말했다. "어떻게 낯모르는 여인네를 그렇게 덥석 안아 건네주실 수 있습니까?" 제자의 힐문에 스승이 웃음 띈 얼굴로 말했다. "아니, 자네는 아직도 그 여인을 안고 있나?"
최치원은 우리 한문학의 비조(鼻祖)로 꼽히지만 최고봉이기도 하다. 자의(字義)와 표현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표음문자 표기의 문학과 달리, 자의와 표현이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성을 유지하는 표의문자 표기의 문학은 과거의 문학 작품과 현금의 문학 작품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평가가 가능하다. 나말(羅末)에 지어진 최치원의 한시는 고려나 조선조에서 지어진 한시 작품과 동일선상에서 비교가 가능하며 이에따라 그 우열을 가릴 수 있다. 이런 동일선상 우열 비교를 해볼 때 최치원의 작품은 단연 수위(首位)를 차지한다.
탁월한 문학 창작 능력이 출세의 보증수표였던 시대, 최치원은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는 자격을 갖췄건만 시대가 그를 수용하지 않아(못해), 슬프게도 세상을 등졌다. 보증수표가 공수표로 취급되는 세상을 바라보며 최치원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진은 최치원의「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으로, 은둔 군자의 재치 넘치는 시로 널리 회자(膾炙)된다.
狂奔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첩첩이 쌓인 돌 위로 미친듯 내달으며 굽이굽이 장쾌한 소리 내지르니
人語難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사람들 말소리 지척서도 분간하기 어려워라
常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옳으네 그르네 찌그럭대는 소리 듣기 싫어
故敎流水盡籠山 고교유수진롱산 내닫는 폭포로 온 산을 감쌌다오
이 시의 표면적 주체는 사람이 아닌 '가야산 독서당'이라는 사물이다. 그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면의 주체는 시인 자신이다. 가야산 독서당이 시비소리를 싫어하여 폭포 소리로 가야산을 둘러싸게 했다는 것은 곧 시인이 시정(市井)의 시비논란이 싫어 산중에 은거했노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세상을 완전히 잊은걸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한참전의 여인을 계속 생각하는 스승의 제자처럼, 여전히 세상을 잊지 못하고 있다. 시인이 진정으로 세상을 잊었다면 시정의 시비소리를 애써 피할 이유가 없다. 시정의 시비를 의식한다는 것은 여전히 세상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건네준 여인의 존재 자체를 잊었던 제자의 스승처럼 될 때, 시인은 진정으로 세상을 잊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시인은 보증수표가 공수표로 취급되는 세상에 등을 돌렸지만 공수표가 다시 보증수표로 환원되기를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은둔군자의 재치 넘치는 작품만으로 보는 것은 단견이다. 당대(當代) 버림받은 인재의 인간적 나약함을 드러낸 작품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낯선 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보자.
疊은 도마 위에 식재료가 겹쳐있는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겹칠 첩. 疊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疊疊(첩첩), 重疊(중첩) 등을 들 수 있겠다.
吼는 口(입 구)와 孔(구멍 공)의 합자이다. 큰[孔, 孔에는 크고 넓다란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 소리로 운다[口]는 뜻이다. 울 후. 吼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獅子吼(사자후), 吼怒(후노, 성내어 으르렁거림) 등을 들 수 있겠다.
巒은 작은 봉오리가 연이어 있는 산이란 뜻이다. 山(뫼 산)으로 뜻을 표현했다.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한다. 뫼 만. 巒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巒峰(만봉, 산봉오리), 巒岡(만강, 작은 산) 등을 들 수 있겠다.
籠은 竹(대 죽)과 龍(용 룡)의 합자이다. 삼태기란 의미이다. 竹으로 뜻을 표현했다. 龍은 음(룡→롱)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용은 본시 변화무쌍한 존재인데, 그같이 흙을 퍼나르기에 손쉽게 활용하기 편한 도구가 삼태기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삼태기 롱. 싸다, 싸이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쌀(싸일) 롱. 籠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籠球(농구), 籠城(농성) 등을 들 수 있겠다.
최치원이 은거했다는 가야산은 일반적으로 경남 합천의 가야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동명(同名)의 산이 내포 지역에도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최치원이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석각들도 있다. 그래서 이곳이 바로 최치원이 은거한 가야산이라는 주장을 한다. 게다가 최치원은 내포 지역에서 군수를 지낸 적도 있기에 더더욱 신빙성이 높다고 말한다. 어느 것이 맞을까? 「제가야산독서당」의 내용으로 보면 경남 합천의 가야산이 맞을 것 같다. 내포 지역 가야산에는 '광분첩석후중만'할만한 폭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각 등의 흔적을 보면 내포 지역의 가야산이 맞을 것도 같다. 그러나 중요한 건 어느 지역의 가야산이 최치원이 은거한 가야산이냐가 아닐 것이다. 은거란 인재가 사장됐다는 의미이고, 인재가 사장된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일 터이다. 한발 더 나아가 그러한 시대가 없기를 희구하는 것이 정작 더 중요한 사안일 터이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취득했는데, 출처를 잊었다, 사진을 올린 분께 고마움과 함께 송구한 마음을 전한다. 글씨가 내용과 잘 어울려 매우 보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