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용산에 있는 헌 책방「뿌리」에 간 적이 있다. 헌 책방이 으레 그렇듯 미어지게 채우는 바람에 끝내 터져버려 추스리기 어려워진 자루마냥 책방 안과 밖은 어떻게 손을 쓰기 어려운 상태로 책들이 쌓여 있었다. 책방이라기 보다는 책 숲 혹은 책 무덤같은 공간이었다.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주인 아주머니가 입구 초입에 있으면서 오는 손님들에게 봉지 커피를 타서 대접했다. 잡지에 소개된 헌 책방 순례에 나온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북적거렸다. 


그날 이곳을 찾은 것은 모처럼만에 서울에 올라왔는데 볼 일만 보고 그냥 내려 가기엔 왠지 아쉬운 느낌이 드는데다 잡지에서 소개된 이곳의 흥미로운 기사 내용 때문이었다. 고가의 희귀본을 저렴한 가격에 구한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 '혹시 내게도 그런 행운이…' 하는 흑심이 떠올랐던 것이다. 헌 책방이 아니래도 이상하게 오래된 가게에 가면 항상 이런 흑심이 피어 오른다. 주인이 알지 못하는 뭔가 값진 것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 미로같은 책방 안을 기웃거리는데 관심가는 고서들이 눈에 띄었지만 가격을 물으니 만만치 않았다. 하긴, 주인의 눈을 속일 저렴한 희귀본이 어디 그리 손쉽게 얻어지겠는가. 눈호강만 실컷 하다가 마지막에 그냥 나오기 미안하여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에버그린 문고판 플라톤의『국가』를 샀다. 500원을 줬던 것 같다. 


사진의 한자는 '노포(老鋪)'라고 읽는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오래 된 가게'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사용한 일본에서 유래된 말이다. '고(古)'보다 '노(老)'라는 말을 쓴 것에서 오래된 가게 그 자체보다 그 가게를 운영하는 장인을 우선시하는 느낌이 강해 가업 계승의 전통이 강한 일본의 문화를 잘 나타낸 용어란 생각이 든다. 우리 말로 대체할 만한 용어를 찾고 있다고 하는데 아직은 뚜렷한 대체어를 찾지 못한 듯하다. 사진에 나온 방송 매체가 '노포'라는 말을 사용하는 자체가 이를 말해준다. 


사진의 노포는 중국집인데 건물도 그렇고 실내 장식도 그렇고 모든 것이 오래 된 티가 난다. 무엇보다 주방장 되는 분이 그렇다. 외관으로 보면 거의 칠십 가까이 돼보인다. 새것이라곤 손님 좌석을 관리하는 전자 계산대 뿐이다. 이곳은 늘 손님이 북적인다. 점심 시간 때는 밖에서 줄을 서 대기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현란한 먹거리와 산뜻한 장식의 가게들도 많으련만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방송을 탄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방송을 타기 이전에도 소문이 났던 곳이니. 6천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이 한 이유일수도 있겠다 싶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싼 맛에 먹는 비지떡은 한 두끼에 그치지 자주 오래도록 찾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래된 것은 바닷가의 둥근 조약돌과 같다. 예리하고 기괴한 맛은 없지만 완숙(完熟)함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헌 책방에 들러 '혹시 내게도…'하는 흑심이 생기는 것은 이런 편안함에 기댄데서 나온 엉뚱한 바램이다. 경직된 상태라면 그런 바램은 추호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교보문고 같은데서 주인의 눈을 속인 희귀본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노포 중국집을 찾는 이들의 심리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고목같은 주방장의 손에서 빚어 나오는 한그릇 짬뽕을 대하면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배부르게 해줄 것 같은 기대가 들기에 찾는 것 아닐까 싶은 것이다. 현란한 먹거리와 산뜻한 장식의 가게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기대이다. 바쁜 점심 시간에 굳이 줄을 서가면서까지 이 노포 중국집을 찾는 이유는 어쩌면 몸의 곡기보다 마음의 곡기가 더 간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老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구부린 채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설과, 人(사람 인)과 毛(털 모)와 匕(化의 약자, 화할 화)의 합자로 머리털이 흑색에서 백색으로 변화한 사람 즉 노인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이다. 늙을 로. 老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老齡(노령), 老化(노화) 등을 들 수 있겠다.


鋪는 金(쇠 금)과 甫(남자의 미칭 보)의 합자이다. 화려한 문고리라는 뜻이다. 金으로 뜻을 표현했다. 甫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남자의 미칭처럼 보기 좋은 장식의 문고리라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문고리 포. 가게라는 의미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가게 포. 鋪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金鋪(금포, 황금 문고리), 店鋪(점포) 등을 들 수 있겠다.


일본과 달리 가업 계승의 장인 문화가 희박한 우리나라에서는 노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오래된 것= 무소용'의 가치관까지 더해져 그나마 있던 노포조차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즐겨 찾던 헌책방은 한군데도 남아 있는 곳이 없다. 음식점도 비슷하지 않을까? 나아가 다른 가게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오래된 가게들의 퇴조는 당연히 아쉬움을 남긴다. 그런데 정작 더 큰 아쉬움은 가게의 퇴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시까지 다다르고 있다는 점이다. '노인=무소용'의 가치관이 그것. 이런 가치관은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포를 중시하는 장인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왠지 노인이 홀대받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과거 물질적 궁핍 속에서도 노인을 공대하는 문화가 있었다. 이건 일본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노인 공대 문화이다. 이것을 되살릴 수는 없는 걸까? 조약돌도 기암괴석 못지 않은 가치와 의미가 분명히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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