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융의 시.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air3308/3865352>
“글쎄? 거기가…”
관광지에 가서 자신이 알고 있는 맛집을 현지 주민에게 물어보면 의외의 답을 듣는 경우가 있다. 거기가 맛집 맞나 하는 표정을 짓거나 심지어 장소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있는 것. 관광객들에게 맛집으로 알려진 곳이 현지 주민에게는 그다지 맛집이 아닌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고장의 맛집은 어디가 진정한 맛집일까? 관광객에게 알려진 맛집일까? 현지 주민이 잘 아는 맛집일까?
진주 촉석루. 논개의 장렬한 최후 장소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관광객에게 이곳은 의기(義妓)의 애국 향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촉석루에 오르기 전 이곳의 논개 사당을 먼저 찾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하지만 촉석루는 본래 전망 좋은 연회 장소였다. 이것이 촉석루의 본모습이다. 논개도 왜장(倭將)들과의 연회에서 그 장렬한 섬광을 발하지 않았던가. 촉석루를 의기의 장렬한 최후 장소로 생각하는 것은 관광객이 찾는 맛집과 같은 경우이고, 연회 혹은 경관 좋은 전망소로 생각하는 것은 현지 주민이 찾는 맛집과 같은 경우라 할 만한다.
사진은 촉석루에 걸린 편액들 중의 하나로 조선 세종 때 사람인 우당(憂堂) 박융(朴融, ?~1428)의 시이다.
晋山形勝冠南區 진산형승관남구 진주의 경치는 남녘 제일
況復臨江有此樓 황부임강유차루 여기에 있는 촉석루라니
列峀層巖成活畵 열수층암성활화 즐비한 산봉우리 층층의 기암괴석 살아 숨 쉬는 그림 같고
茂林修竹傍淸流 무림수죽방청류 맑은 물 흐르는 곳엔 무성한 숲과 청청한 대나무
靑嵐髣髴屛間起 청람방불병간기 아스라한 푸른 기운 병풍에서 흘러나와 숨을 쉬는 듯
白鳥依稀鏡裏浮 백조의희경리부 백조 또한 거울 위에 떠있는 듯
已識地靈生俊傑 이식지령생준걸 인걸은 지령이라 내 이미 알거니
盛朝相繼薛居州 성조상계설거주 아름다운 선비들 이 땅에서 나올 수밖에
촉석루의 아름다운 풍치를 그렸다. 흔히 아름다운 것을 볼 때 '그림 같다'라고 말하는데 이 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아 숨 쉬는 그림'같다고 말했다. 최상의 감탄사를 사용한 것이다. 시 마지막에 아름다운 선비의 연이은 출현이란 말로 또 한 번 이곳의 승경(勝景)을 찬미했다. 예로부터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좋은 땅에서― 여기서는 촉석루가 있는 진주일 것이다 ― 훌륭한 인물이 나온다고 믿었다. '인걸 지령'으로 승경을 한 번 더 강화해 찬미한 것이다.
이 시는 촉석루가 뛰어난 경관을 가진 연회에 좋은 장소임을 여실히 그린 작품이다. 사실 이 시의 내용이 촉석루의 진면목일 것이다. 여기서 논개를 기억하는 것도 아름답지만 본래의 모습, 즉 승경만 감상하는 것도 그만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이곳의 편액들을 조사해본 적은 없지만 논개의 의사(義死) 이후로 이곳의 편액 내용은 양분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논개의 의사 이전 시는 승경에만 중점을, 논개의 의사 이후 시는 논개의 향취에 중점을 두었을 것 같다. 이 시는 논개의 의사 이전 시이다. 순수한 승경 감상에만 치중한 것. 현지인이 즐겨 찾는 맛집 같은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진주 촉석루. 사진 출처: http://www.jinju.go.kr/main.web>
낯선 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보자.
峀는 山(뫼 산)과 由(단지 유)의 합자이다. 주변이 높고 가운데가 움푹한 단지처럼 산의 중앙에 생긴 동굴이란 의미이다. 산굴 수. 산봉우리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산굴 수. 峀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峀居(수거, 산 동굴에서 삶), 峀雲(수운, 산의 암굴에서 일어나는 구름) 등을 들 수 있겠다.
傍은 亻(사람 인)과 旁(두루 방)의 합자이다. 이 사람과 저 사람 간의 간격이 멀지 않다란 의미이다. 곁 방. 傍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傍觀(방관), 傍點(방점) 등을 들 수 있겠다.
嵐은 山(뫼 산)과 風(바람 풍)의 합자이다. 산바람이란 뜻이다. 남기(저녁나절에 멀리 보이는 산 같은데 떠오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남기 람. 嵐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嵐影湖光(남영호광, 산의 그림자와 호수의 빛깔이란 뜻으로, 산수의 풍광을 이름), 嵐光(남광, 남기가 떠올라 해에 비치는 경치) 등을 들 수 있겠다.
稀는 禾(벼 화)와 希(드물 희)의 합자이다. 모를 뜨문뜨문 심었다는 의미이다. 의미를 압축하여 '드물다란' 의미로 사용한다. 드물 희. 稀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稀少(희소), 稀微(희미) 등을 들 수 있겠다.
薛은 쑥이란 뜻이다. 艹(풀 초)로 뜻을 표현했고, 나머지는 음을 담당한다. 주로 사람의 성씨로 많이 사용한다. 쑥 설. 薛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薛濤(설도, 당나라 중기의 유명 여류 시인), 薛誓幢(설서당, 원효 대사의 출가 전 성명)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위에서 이 시를 촉석루의 풍치 잘 그린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이 시가 사용하고 있는 수사(修辭)는 좀 진부하다. 이런 풍경 묘사는 어느 승경에도 어울릴법한 진부한 표현인 것. 촉석루만이 가지는 좀 더 산뜻한 풍경 묘사가 없는 점이 아쉽다. 여기에 설거주라는 인명― 『맹자』에 나오는 인물로, 송(宋) 나라의 훌륭한 선비로 명망이 높았다 ― 을 직접 사용한 것도 그리 좋은 표현법은 아니다. 불만 많은 시를 굳이 글감으로 사용한 것은 순전히 이 편액의 글씨 때문이었다. 내용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촉석루에 어울리는 글씨라는 느낌이 든 것(박융이 직접 쓴 것인지, 후인이 쓴 것인지는 모르겠다). 코로나19 때문에 일상이 더없이 답답하다. 코로나19에서 해금되면 이곳을 찾아 울울했던 마음을 풀어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