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가 여러 부장님들과 함께 하는 첫 날이니, 오늘만 잔소리를 좀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하지 않을게요."


새로 부임한 장(長)은 전에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장이 되기 전 한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사람은 나쁘지 않았지만 부하 직원과의 소통이 전혀 없는 것이 큰 흠이었다. 일이란 사람이 하는 것인데, 부하 직원과 소통이 없으니 일 추진이 빡빡하기 그지 없었다. 그를 대하면 벽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는데(건강 검진에서 모 부위의 암이 발견되었다), 아무도 그에게 병문안을 가지 않았다. 그가 퇴원하여 출근하던 날, 사무실에 들어서며 고성을 내질렀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입원을 했는데 아무도 병문안을 안오는거야!" 듣는 직원들은 침묵 속에 서로 눈짓 대화만 할 뿐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에게 대꾸했다. '이보세요. 다 당신이 한대로 받은 거에요.' 재미있는 건 이런 그가 늘 강조하던 것은 '소통'이었다.


이제 장이 된 그가 한 첫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반신반의했다. '아니, 큰 병을 앓고 나더니 사람이 변했나?' 하지만 사람이 어디 그리 쉽게 변하던가.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전 버릇은 다시 도졌다. 자신이 한 일성(一聲)을 잊어 버렸는지 시일이 좀 지나자 업무 관계로 부장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제 버릇 개 줄까?'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한 마디 더했다. '어휴, 차라리 말이나 말지.'


소통은 어렵다. 내가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가 나를 이해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는데 어떻게 상대와 소통이 쉽사리 되겠는가. 많은 경우 우리가 소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소통의 모양새를 갖춘 것이지 실제는 소통이라고 하기 어렵다. 소통은 나와 남의 이해를 바탕으로 열리는 제 3의 세계이다.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사진의 한자는 한글로 써있는 것과 같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고 읽는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백제 온조왕이 한수 이남으로 천도하고 궁을 세웠는데, 그 궁을 두고 일컬은 말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조에 나온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건물은 어떤 건물일까? 실물을 볼 길 없으니 더없이 아쉽다. 백제 문화 단지에 세트장처럼 지어놓은 건물을 보고 그것을 상상한다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그저 그 건축 미학을 생각해볼 뿐이다. 검소와 누추 그리고 화려와 사치의 중간 지점이란 단순히 그 중간을 의미하지 않고 양 극단을 넘어서는 제 3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소통'과 같은 경지라고나 할까? 양 극단을 넘어서는 제 3의 형태의 미는 가장 균형잡힌 미가 아닐까 싶다.


삼국 중 미적으로 가장 세련된 나라는 백제였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 미의 아름다움은 바로 저 제 3의 형태인 '소통의 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 삼존불을 봐도 이를 확인하게 된다(아래 사진). 소통이 이뤄질 때는 앙금이 없기에 밝고 환한 미소를 짓게 된다. 마애 삼존불의 미소는 바로 그 미소이다.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儉은 亻(사람 인)과 僉(다 첨)의 합자이다. 검소하다란 의미이다.  亻으로 뜻을 표현했다. 僉은 음(첨→검)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어느 한 부분만 절제하는 것이 검소한 것이 아니고 전반적으로 절제하는 것이 검소한 것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검소할 검.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儉素(검소), 儉約(검약) 등을 들 수 있겠다.


陋는 阝(언덕 부)와 㔷 (더러울 루) 변형자의 합자이다. 좁다란 의미이다.  阝로 뜻을 표현했다. 㔷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좁은 곳은 대개 더러운 곳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좁을 루. 누추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누추할 루.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固陋(고루), 陋醜(누추) 등을 들 수 있겠다.


華는 꽃이 피었다는 뜻이다. 윗부분의 艹(풀 초)로 뜻을 표현했고, 아랫부분은 음을 담당한다. 꽃 화. 화려하다 혹은 빛나다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화려할(빛날) 화.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華麗(화려), 榮華(영화) 등을 들 수 있겠다.


侈는 亻(사람 인)과 多(많을 다)의 합자이다. 사치스럽다란 의미이다. 亻으로 뜻을 표현했다. 多는 음(다→치)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과도할 정도로 많은 것을 과시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것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사치할 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奢侈(사치), 侈傲(치오, 우쭐하고 거만함)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위 문장에서 ‘而는 변증법적 기능을 담당하는 독특한 허사이다. 시공간의 극단을 넘어 이들을 상호 중재하는 기능을 한다. 단순히 '그러나'의 의미만으로 풀이되기에는 뭔가 허전한 그런 의미를 담은 허사이다. 저 문장에서 '而'를 빼고, 즉 '儉不陋 華不'라고 쓸 수도 있으나, '而'를 넣은 '儉而不陋 華而不侈'와는 그 어감이랄까 문장의 맛이 현격히 떨어진다. 이러한 맛을 번역으로는 도저히 전달하기 어렵다. 사진은 https://cafe.naver.com/sk1964/819 에서 얻었다. 부여의 백제 문화 단지에서 찍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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