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좋아질거야!"


좋아지지 않았다.


아버지 생전에 용하다는 무당 집에 두 번 간적이 있다. 한 번은 (아버지) 눈이 갑자기 보이지 않게 돼서 갔고, 한 번은 병으로 앓아 누우셔서 갔다. 간 곳에서 모두 긍정적인 답을 해줬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눈은 더 보이지 않게 되었고, 병은 더 악화되었다. 그들은 나를 속인 것일까?


사진의 한자는 한글로 표기된 바와 같이 '천우장군(天愚將軍)'이라고 읽는다. 무당들은 저마다 모시는 신이 다르다. 저 펼침막을 붙인 무당은 장군신을 모시는 무당이다('천우'가 어떤 장군인지는 모르겠다). 펼침막을 붙인 것을 보니, 최근에 신내림을 받은 듯하다. 대개 신내림을 받은 초기는 영험이 있다는 속설이 있다. 그런 속설에 기대 광고를 한 듯 보인다.


많은 이들이 무속 신앙에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다. 대체로 방송 매체를 통해 형성된 것이 많다. 특히 범죄― 살인, 사기 등 ―와 관련해서 무속 신앙을 다룬 경우가 많아 그 영향이 큰 듯 싶다. 하지만 무속 신앙은 고등 종교의 원초 형태이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불교를 믿는다고 잰 체할 이유가 없다. 고등 종교는 화려한 옷을 걸친 것 뿐이고, 무속 신앙은 소박한 옷을 걸친 것 뿐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었어도 그것을 벗으면 똑같은 나신(裸身)일 뿐이잖은가?


무속 신앙을 찾는 것은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이다. 고등 종교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무속인을 찾으면 비용을 지불한다. 고등 종교를 찾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외려 고등 종교는 의례화된 형식을 빌어 지속적으로 비용을 내게 만들지만, 무속인을 찾을 때는 그 때만 지불하면 되니 비용이 덜 든다고 할 수도 있다.


무속 신앙에 극력 반대하는 사람들을 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엑셀도 좋지만 주판도 때로는 쓸모가 있다. 각자가 편한대로 쓸 뿐이다. 무속 신앙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는 것 뿐.


아버지 때문에 찾았던 무속인이 나를 속였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절박한 심정에서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그 마음을 헤아려, 내게 해주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속였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어리석은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의 삶을 그에게 의탁한단 말인가! 그의 말은 그저 참고로 받아들인 것 뿐이다. 참고 의견에는 긍정도 있고 부정도 있지 않던가! 


펼침막을 보면서 왠지 많은 이들이 '요즘 시대에 웬…'하는 생각을 하며 무속 신앙을 하찮게 여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횡설수설 해보았다. (위에서는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론 그렇게 됐다.)


愚와 將이 낯설다. 자세히 살펴본다.


愚는 心(마음 심)과 禺(원숭이 우)의 합자이다. 원숭이같이 답답한 심사를 가진 사람이란 의미이다. 어리석을 우. 愚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愚鈍(우둔), 愚昧(우매) 등을 들 수 있겠다.


將은 寸(마디 촌)과 醬(장 장)의 약자가 합쳐진 것이다. 장수라는 의미이다. 장수는 원칙과 법도가 있어야 부하를 통솔할 수 있기에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寸으로 뜻을 표현했다. 醬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맛을 조화시키는 장처럼 부하들의 여러 요구를 잘 조화시켜 이끄는 이가 장수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장수 장. 將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將軍(장군), 將星(장성) 등을 들 수 있겠다.


펼침막의 배치가 재미있다. 원초적 욕망과 불안을 다룬 것이 위 아래에 있고, 문명의 발달을 보여주는 것이 중간에 있기 때문. 문명의 발달이란 원초적 욕망과 불안을 해결하면서 쌓아온 것이란 메시지로도 읽히고,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원초적 욕망과 불안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로도 읽힌다. 재미있게 배치된 펼침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