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바람 일어나니 구름이 나는도다

위엄을 해내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도다

어떻게 하면 용맹스런 군사 얻어 사방을 지킬 수 있을까

 

한 고조 유방(劉邦, 재위 BC 202195)대풍가(大風歌)이다. 제왕의 기상을 드러낸 시라고 평가받는다. 유방은 제왕의 기상이 있었기에 이런 시를 지은 것일까, 아니면 제왕의 위치에 있었기에 이런 시를 지은 것일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질문과 유사하다. 그런데 닭과 달걀의 선후 문제는 답이 있다. 달걀이 먼저라고 한다. 그렇다면 제왕의 기상이 먼저냐 제왕의 위치가 먼저냐의 선후 문제도 답이 있을까?

 

사진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3대 황제인 티에우찌의 시이다. 후에 왕궁을 방문하여 찍은 것이다.

 

 

御製夏咏 어제하영    황제께서 지으심    여름날의 노래

梅亭陣雨 매정진우    매정에서  소나기를 만나다

 

五月江南菓熟時 오월강남과숙시   오월이라 강남땅 과일 익어가는 때

斜陽倒峽驟來施 사양도협취래시   석양 녘 노을이 골짜기로 밀려드네

溟濛山館生煙篆 명몽산관생연전   비 내려 어둑한 정자엔 향 연기 피어오르고

格礫林坳標朹枝 격력임요표구지   우거진 숲 담장엔 산사 가지 우뚝 솟았네

邨樹飄零黃爛綬 촌수표령황난수   촌락의 나무들 샛노란 잎 줄줄이 떨어뜨리고

農溝湧漲白參差 농구용창백참치   논 도랑엔 물 불어나 흰 물결이 넘실거리네

幾回倏飮長空靜 기회숙음장공정   몇 번 인가 휘몰아치다 하늘 고요해지니

無限淸凉萬物宜 무한청량만물의   가없는 청량감에 만물은 흡족한 듯

 

紹治乙巳恭錄 소치을사공록   소치 을사년에 삼가 쓰다

 

 

정자에서 만난 소나기를 소재로 지은 시이다. 소나기 오기 전의 풍경과 소나기가 오는 무렵의 풍경 그리고 소나기가 개인 후의 풍경을 그렸다. 이 시에서 제왕의 풍모가 느껴질까? 섬세하게 소나기 전 · · 후의 모습을 그렸기에 그다지 큰 기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황제의 시다운 면모가 보인다. 마지막 구 가없는 청량감에 만물은 흡족한 듯(無限淸凉萬物宜)”이 바로 그것. 개인적으로 느끼는 청량감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황제의 시라는 것을 감안하면, 만물()을 생각하는 지도자의 면모가 느껴지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맹자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노나라 군주가 송나라에 갔는데 성문에서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그 소리를 들은 문지기가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 사람은 우리 임금이 아닌데 어찌 이리도 우리 임금과 목소리가 비슷할까?” 맹자는 이런 풀이를 한다. “다른 이유가 없다. 처한 위치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제왕의 기상이 먼저냐 제왕의 위치가 먼저냐의 선후 문제도 답이 있을까? 맹자의 견해를 빈다면 제왕의 위치가 먼저라고 볼 수 있다. 한 고조 유방의 시나 응우옌 왕조 3대 황제 티에우찌의 시에 천하/만물을 생각하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들이 천하를 생각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데, 허언(虛言)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설혹 자리에 어울리는 기상을 갖지 못했다 해도 계속 그 자리에 있게 되면 점차 그 자리에 맞는 기상을 갖게 되는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견강부회(牽强附會)한 생각일까?

 

낯선 한자를 서너 자 자세히 살펴보자.

 

(물 수)(덮을 몽)의 합자이다. 가랑비가 내려 시야가 흐릿하다는 뜻이다. 로 뜻을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무엇인가에 덮여 답답한 것처럼 가랑비와 안개가 뒤섞여 시야가 흐릿하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가랑비 올 몽. 흐릿할 몽.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濛漠(몽막, 어둑어둑한 모양), 濛昧(몽매, 안개 같은 것이 자욱하여 어두운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다.

 

(대 죽)(판단할 단)의 합자이다. 글자를 쓴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죽간(竹簡)에 글자를 썼기에 으로 뜻을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은 본래 (돼지 시)와 같은 의미로 돼지머리와 주둥이를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돼지가 주둥이로 땅을 파헤치듯 계속 글자를 써나간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지금은 글자를 쓴다는 의미보다 글자체의 한 종류인 전자를 의미하는 뜻으로 주로 사용한다. 전자 전.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篆烟(전연, 전자 모양으로 꼬불꼬불 올라가는 향로의 연기), 篆刻(전각, 전자를 새김. 어구의 치레에만 힘쓰고 실질이 없는 문장을 뜻함) 등을 들 수 있겠다.

 

(진칠 둔)(고을 읍)의 합자이다. 마을이란 뜻이다. 으로 뜻을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군인들이 모여 진을 치듯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사는 곳이 마을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마을 촌.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邨落(촌락), 鄕邨(향촌) 등을 들 수 있겠다.

 

(물 수)(날랠 용)의 합자이다. 샘솟다라는 뜻이다. 로 뜻을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하면서 본뜻을 보충한다. 샘솟을 용.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湧出(용출, 물이 솟아 나옴), 湧沫(용말, 솟아 나오는 거품)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티에우찌 황제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박()한 평가 일색이었다. 박한 평가의 주 근거는 다가오는 제국주의 세력을 쇄국으로 저지하려 했고 그 와중에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패해 불평등 조약을 맺고 개항한 사실이었다. 구한말(舊韓末) 실질적 군주 노릇을 했던 대원군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 평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긍정적 평가도 있다. 티에우찌 황제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후에 왕궁 사진을 한 컷 소개한다. 후에 왕궁은 자금성을 모방하여 건축했다고 한다. 4~6구의 해석이 흔쾌하지 않다. 사진의 한자가 흐릿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보태어 시를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읽는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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