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강동의 張翰(장한) 생애를 / 가을 바람에 홀연 고향 그리워 강동으로 돌아갔지 / 생전의 한잔 술이 좋지 / 천년 뒤의 명예가 무슨 소용인가

 

이백의 「行路難(행로난)」일부분이에요. 가을 바람이 불자 홀연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 생각이 나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한 장한의 결행을 찬미하고 있어요. 장한은 왜 힘들게 들어섰을 벼슬길을 헌신처럼 내버리고 귀향했을까요? 고향에서 먹던 순채국과 농어회가, 벼슬을 그만 둘 정도로, 정말 그토록 간절했을까요? 그랬을수도 있지만, 그건 그저 장한의 마음을 건드린 자극(핑계))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미 그의 마음 속엔 귀향의 결심이 무르익은 상태였을 거예요. 그렇지 않을까요? 우발적으로 보이는 일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코 우발적이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잖아요? 내막을 모르기에 우발적으로 보이는 것 뿐이죠.

 

사진은 대구 침산 공원에 있는 徐居正(서거정, 1420-1488) 「砧山晩照(침산만조)」시비예요.

 

水自西流山盡頭  수자서류산진두  물은 서쪽에서 흘러와 산머리에 이르고

砧巒蒼翠屬淸秋  침만창취속청추  침산 푸른 숲에는 가을 빛이 어리었네

晩風何處舂聲急  만풍하처용성급  해질녘 바람에 묻어오는 촉급한 방아소리

一任斜陽搗客愁  일임사양도객수  석양의 객수를 아프게 두드리네

 

나그네 설움을 토로하고 있어요. 멋진 풍경과 대조를 이루니 나그네 설움이 더더욱 핍진해요. 재미있는 것은 나그네 설움을 돋우는 자극이 '방아소리'라는 거예요. 이 방아소리는 저 장한의 순채국과 농어회 같은 자극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새삼스레 자극하기에 애처롭게 들리는 걸 거예요. 시인에게 방아소리는 단순한 방아소리가 아닌 남다른 느낌을 전하는 그 무언가일 거예요. 그렇기에 남다르게 그의 고단한 객수를 자극하는 것이죠.

 

남다른 느낌을 주는 방아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어릴 적의 추억일 수도 있겠고, 집안의 그리운 풍경일 수도 있겠고, 다소 저급하지만 아내와의 房事(방사)― 방아는 흔히 남녀의 교합을 은유하죠―일수도 있을 거예요. 여하간 그에게 방아소리는 남다른 그 무엇이고 그 남다른 소리로 인하여 자신의 나그네 처지가 새삼스럽게 인식됐을 거예요. 그리고 이는 귀향의 결의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본래 이 시는 「達城十景(달성십경)」이라는 서거정의 연작시 중 한 수예요. 몇 경 몇 경을 읊는 연작시는 대개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두는데, 이 시는 풍경의 아름다움보다 객수의 고단함을 일깨우는 것이 주가 돼서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려워요.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砧은 石(돌 석)과 占(점칠 점)의 합자예요. 다듬잇돌이란 의미예요. 石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占을 음을 담당해요. 다듬잇돌 침. 砧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砧石(침석, 다듬잇돌), 砧杵(침저, 다듬잇 방망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巒은 작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는 산이란 의미예요. 山(뫼 산)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뫼 만. 巒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巒峰(만봉, 산봉우리), 巒岡(만강, 언덕 혹은 작은 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舂은 (拱의 옛 글자, 두 손 맞잡을 공)과 臼(절구 구)의 합자예요. 두 손으로 절구 공이를 들고 절구통에 임한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곡식을 찧는다는 의미예요. 찧을 용. 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舂碓(용대, 절구통), 舂炊(용취, 절구질과 밥 짓는 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搗는 扌(手의 변형, 손 수)와 島(섬 도)의 합자예요. 공이를 들고 찧거나 두드린다는 의미예요.  扌로 뜻을, 島로 음을 표현했어요. 찧을(두드릴) 도. 擣와 통용해요. 搗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搗衣(도의, 다듬이질을 함), 搗精(도정, 현미를 찧거나 쓿어서 등겨를 내어 희고 깨끗하게 만듦)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愁 는 秋(가을 추)와 心(마음 심)의 합자예요. 우울한 마음이란 의미예요. 心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秋는 음(추→수)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가을이 되면 만물이 쇠락하여 풍경을 접할 때마다 우울한 마음이 든다는 의미로요, 근심 수. 愁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愁心(수심), 憂愁(우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위에서 시를 혹평했지만 이 시를 침산의 수려한 풍광과 특히 이곳에서 맞이하는 저녁 풍경이 운치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으로 본다면, 그 나름대로 성공한 시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저는 약간 삐딱하게 봤지만요). 서거정의 본관은 '달성'이에요. 자신의 뿌리 풍경을 읊는 소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읊는 소회와 분명 다를 거예요. 위 시를 포함한 '달성십경'시는 서거정이 자신의 본향에 바친 흠모의 헌사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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