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운()이요 격()이다. 많은 것이 제일 아니요, 크다 하여 좋을 것 없다. 있을 곳에 있어야 하고, 놓일 때에 놓여야 한다. 비로소 그 향기-향내 가 나고, 까닭에 그 품위-격이 있는 것이다.

    

 

월탄 박종화(1901~1981) 선생의 수선화(水仙花)란 수필 일부분이에요. 무리지어 핀 수선화보다 함초롬히 핀 두어 송이 수선화가 더 품위 있어 보인다고 말하고 있어요. 수선화는 무리지어 필 때도 아름답지만 사진의 수선화처럼 외로이 피어있는 모습도 그 못지않게 아름다워요. 아름다움은 약간의 고독과 도도함이 더해질 때 더 빛을 발하는 것 같거든요. 정호승 시인의 유명한 시 수선화에게도 외롭게 피어있는 수선화를 보고 지은 듯해요.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수선화의 속명인 나르키수스(Narciss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라는 미소년의 이름에서 유래됐다고 해요. 이 소년은 샘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다 물에 빠져죽었고, 그 자리에서 피어 난 꽃이 수선화라고 하죠. 자기애(自己愛)라는 꽃말도 여기서 연유한 것이고요. 수선화라는 한자명 역시 물가의 선녀 같은 꽃이라는 라는 뜻이 말해주듯 아름다움과 상관성이 깊어요. 황정견(黃庭堅, 10451105)수선화란 시를 보면,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해 조식(曹植, 192232)낙신부(洛神賦)일부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경국지색이란 성어를 원용하고 있어요(1구와 5). 낙신부는 고래로 미인의 묘사에 대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데 그 내용을 원용했다는 것은 수선화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죠. 경국지색의 원용 역시 매한가지구요.

 

 

凌波仙子生塵襪 능파선자생진말   물결 타고 걷는 선녀 가벼운 포말을 일으키며

水上盈盈步微月 수상영영보미월   물 위를 사뿐사뿐 희미한 달빛 아래 걷는 듯

是誰招此斷腸魂 시수초차단장혼   그 누가 이 애끓는 혼 불러다

種作寒花寄愁絶 종작한화기수절   차가운 꽃 만들고 애절한 시름 붙였는가

含香體素欲傾城 함향체소욕경성   향기 품은 하얀 몸 경국지색 미인이니

山礬是弟梅是兄 산반시제매시형   산반화는 아우요 매화는 형이로다

坐對眞成被花惱 좌대진성피화뇌   앉아서 보노라니 참으로 아찔하여

出門一笑大江橫 출문일소대강횡   문 나서 크게 웃자 대강(大江)은 유유히

 

 

그런데 정작 황정견의 시에서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것은 고사의 원용을 통한 묘사보다는 마지막 문 나서 크게 웃자 대강은 유유히란 구절이에요. 이 구절은 장대한 강물과 같은 웅혼함을 간직해야 할 사대부인 자신이 잠시 고혹적인 아름다움에 빠져 혼미한 상태에 있었음을 반성하는 내용이에요. 역설적으로 수선화의 아름다움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저도 황량한 마당 한 켠을 환하게 밝혀준 수선화가 고마워 시 한 수를 지었어요. 막상 지어놓고 보니 너무 엄숙한 분위기가 풍겨 산뜻한 미감을 전달하지 못하는 졸작이 되고 말았어요.

 

 

德必有隣古來及 덕필유린고래급   예부터 이르길 덕 있으면 외롭지 않다고

知音一壓百不知 지음일압백부지   한 사람의 지인이 무정한 백 사람 보다 나은 법

勿悲斜丘獨開爛 물비사구독개난   비탈진 어덕에 홀로 피었다 슬퍼 마소

吾認汝形最上姿 오인여형최상자   나는 그대가 세상 무엇보다 아름답소

 

 

수선화는 암컷과 수컷이 있어, 암컷만 꽃을 피워요. 사진에서 보면 매화나무 밑에 있는 녀석들이 수컷인데 무리지어 있기만 하지 꽃은 없어요. 반면 암컷은 떨어져서 저렇게 도도하게 꽃을 피우고 있구요. 저 수컷들 애간장이 탈 것 같아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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