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자금성의 황혼』(돌베개, 2008) 21쪽>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 것이다. 삶보다 소중한 것이 있기에 삶을 구차히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이며, 죽음이 싫지만 죽음보다 더 싫은 것이 있기에 구차히 환란(患亂)을 피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사진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1906~1967)가 그의 외국인 사부였던 존스톤(Johnston, 중국명 莊士敦(장사돈))의 저서 자금성의 황혼(Twilight in the Forbidden City)에 써 준 추천사예요(글씨는 신하였던 정효서의 글씨). 읽어 볼까요?

  


甲子十月 予自北府入日本使館 莊士敦師傅首翼予出於險地 且先見日使芳澤言之 芳澤乃禮予 假館而避亂軍 乙丑二月 予復移居天津 距今七年 而莊士敦前後從予於北京天津之間者約十三年中 更患亂倉皇顚沛之際 唯莊士敦知之最上 今乃能秉筆記其所歷 多他人所不及知者 嗟夫 喪亂之餘 得此目擊身經之寶錄 信乎其可貴也 莊士敦雄文高行爲中國儒者所不及 此書旣出 予知其爲當世所重必矣 辛未九月


갑자십월 여자북부입일본사관 장사돈사부수익여출어험지 차선견일사방택언지 방택내예여 가관이피난군 을축이월 여부이거천진 거금칠년 이장사돈전후종여어북경천진지간자약십삼년중 경환난창황전패지제 유장사돈지지최상 금내능병필기기소력 다타인소부급지자 차부 상난지여 득차목격신경지보록 신호기가귀야 장사돈웅문고행위중국유자소불급 차서기출 여지기위당세소중필의 신미구월

 

갑자년(1924) 10월 나는 북부(부의의 아버지인 순친왕의 저택)에서 일본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장사돈(Johnston) 사부는 앞장서 나를 험지에서 구출해 주었다. 또한 먼저 일본 공사 방택(요시자와)을 만나 나의 상황을 얘기했기에 방택은 나를 예우하고 처소를 내주어 반란군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을축년(1925) 2월 나는 다시 거처를 천진으로 옮겼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이다. 장사돈 사부는 이 일 전후로 북경에서 천진까지 나를 수종(隨從)한 것이 대략 13년이 된다. 게다가 가장 어렵고 혼란한 시기의 일들은 오직 장사부 만이 가장 잘 안다. 이제 그가 붓을 잡아 그 사이의 내력을 썼는바 남들은 잘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다. ,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관해 이처럼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소중한 기록을 얻었으니 참으로 귀한 기록이라 할 만한다. 장사부의 웅혼한 글과 행동은 중국의 유자들도 따라오지 못할 바가 있다. 이 책이 출간 후 세상으로부터 중한 대우를 받으리란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신미년(1931) 9.

  


부의는 3세 무렵 황제 위에 올라 15년을 자금성에서 유폐되다시피 보내다 공화주의자였던 풍옥상에게 내몰려 자금성을 나오게 돼요. 이후 풍옥상의 위해(危害)를 피해 일본 공사관에 피신했다 다시 천진의 일본 조계지(租界地)로 옮겨 7년여를 보내요. 부의는 자금성 출궁 전후로 13년여를 자신과 함께 지내며 힘든 시기마다 자신을 보살펴 준 장사돈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어요. 더불어 어려운 시절의 일들에 대한 진위를 가린 장사돈의 저서가 갖는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고요. 이 글을 읽으면 더없이 외롭고 힘든 처지에 있었던(있는) 한 청년 황제의 애틋한 모습이 떠오르며 까닭모를 동정심이 밀려와요. 그러면서도 이 동정심에 대해 자문(自問)을 하게 돼요. ‘이게 과연 올바른 동정심일까?’

 

부의가 일개 범인(凡人)이라면 이 동정심은 정당하지만, 그가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문제의식의 바탕엔 저 맹자의 언급(인용문)이 있어요. 저 말의 표면적 주체는 맹자이지만, 이면적으론 정치 지도자를 겨냥한 거예요. 맹자는 정치철학서이기 때문이죠. 맹자는 (삶의 대척점. 죽음)’의 갈림길에서 정치 지도자가 택해야 할 길은 라고 주장해요. 그것이 삶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소중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그것은 명분/명예예요. 정치에서 이보다 더 중한 것이 없기 때문이죠. 명분/명예 없는 지도자의 명을 그 누가 따르던가요? 정치 지도자가 명분/명예를 잃으면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삶과 의의 갈림길에서 의를 택해야한다고 말한 거예요. 부의는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어요. 그런데 그는 위난(危難)의 시기에 보다 을 택했어요. 이런 그에게 동정심을 갖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자문을 아니 할 수 없어요.

 

혹자는 이런 이의(異議)를 달지도 모르겠어요. “부의는 모든 실권(實權)을 잃은 명목상의 황제일 뿐이었다. 그가 무슨 명분과 명예가 필요해 를 중시한단 말인가?” 타당한 이의예요. 그러나 당시 민중의 의식에는 여전히 존황(尊皇)의식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고, 이는 공화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랬기에 황제를 자금성에서 바로 내쫓거나 죽이지 않았던 것이죠. 이런 상황이라면 황제에게는 여전히 명분/명예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더구나 그는 웅건(雄健)한 만주족의 기상을 물려받은 황제였어요. 위난의 시기에 의보다 삶을 택한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죠.

 

부의가 삶보다 의를 선택할 기회는 세 번 있었어요. 풍옥상에게 자금성에서 쫓겨났을 때(1924)와 일본으로부터 만주국 집정(執政)을 요청받았을 때(1931) 그리고 소련에 의해 만주국이 패망했을 때(1945)예요. 세 선택의 갈림길에서 부이는 모두 삶을 선택했어요. 그리고 그 결과는 살아있으되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존재로서의 삶이었죠. 만일 그가 삶보다 의를 선택했다면 죽었으되 영원히 사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거예요. 위난의 시기에 부의는 장려(壯麗)한 죽음을 택했어야 했어요. 너무 과한 주문일까요?

  


주요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볼까요?

 

广(집 엄)(줄 부)의 합자예요. 문서를 보관하는 장소라는 의미예요. 广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소중히 주고받아야 할 문서를 보관하는 장소란 의미로요. 곳집 부. 마을이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 의미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마을 부.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府庫(부고, 궁정의 문서나 재보를 보관하는 장소), 政府(정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본래 분노했다는 의미예요. 분노하면 치고받기에 (칠 복)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지금은 주로 도탑다[]란 뜻으로 사용하는데, 본 의미에서 유추된 뜻이에요. 분노가 팽배하듯 덕이 두텁다란 의미로요. 도타울 돈. 서직(黍稷, 기장)을 담은 그릇을 표현한 글자로 보기도 해요. 제기 대.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敦篤(돈독), 敦槩(대개, 곡식을 됫박에 담고 그 위를 반듯하게 밀어내는 평평한 나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의 약자, 언덕 부)(다 첨)의 합자예요.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험준한 장소란 의미예요. 험할 험.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保險(보험), 危險(위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사람 인)(빌 가)의 합자예요. 거짓이란 의미예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빌려온 것은 내 것이 아니기에 진짜가 아니고 가짜[거짓]란 의미로요. 거짓 가.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假面(가면), 假飾(가식)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착)(법 벽)의 합자예요. 피하다란 의미예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법은 어기면 처벌을 받기에 사람들이 피하려든다는 의미로요. 피할 피.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逃避(도피), 回避(회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머리 혈)(참 진)의 합자예요. 정수리란 의미예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해요. 정수리 전. 넘어지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 의미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넘어질 전.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山顚(산전, 산 꼭대기), 顚倒(전도, 거꾸로 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물 수)(저자 시)의 합자예요. 물 이름이에요. 로 뜻을, 로 음()을 표현했어요. 물이름 패. 넘어지다란 뜻으로 사용하는데, 동음을 빌미로 뜻을 가탁한 거예요. 넘어질 패.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沛水(패수), 顚沛(전패, 엎어지고 자빠짐)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울 곡)(없을 망)의 합자예요. 현세에서 그 모습을 찾을 길 없어, 즉 죽어서 슬퍼한다란 의미예요. 죽을 상. 잃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 의미에서 유추된 뜻이에요. 잃을 상.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初喪(초상), 喪失(상실)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새 추)(팔뚝 굉)의 약자가 합쳐진 거예요. 수컷 새란 의미예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의 약자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암컷 새에 비해 힘이 센[의 약자가 가진 의미] 것이 수컷 새란 의미로요. 수컷 웅. 뛰어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 의미에서 유추된 뜻이에요. 뛰어날 웅.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雌雄(자웅), 雄壯(웅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부의가 의보다 삶을 우선시한 건 그의 사부들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요. 세 살 무렵부터 자금성에 들어와 생활한 그에게 사부들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런 점에서 부의의 명예롭지 못한 선택의 책임은 부의에게만 물을 것이 아니라 그의 스승들에게도 물어야 할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는 당연히 장사돈도 포함돼야 할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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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 2018-11-17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회찬‘씨가 생각나는 글입니다. 그분은 ‘살아도 죽은 거나 다름 없는 불명예‘를 과감히 버리고 영원히 명예를 지키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무심은 그분의 사라짐을 지금도 안타까워합니다.

찔레꽃 2018-11-18 10:15   좋아요 0 | URL
선생님, 잘 지내시죠? 저 역시 그 분의 죽음에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을 높이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지만 경우엔 따라서 필요한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명분과 명예가 필요한 경우. 노 의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글을 썼는데, 선생님 평을 듣고 보니, 묘하게 그 분을 생각나게 하는 글이 되었습니다. 노 의원을 생각하는 마음이 잠재돼있다 저도 모르게 발현됐나 봅니다.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