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 출처: http://100.daum.net/multimedia/entry/14XXE0072943>

 

 

"..."

 

점심 때. 식탁에 늦게 갔더니 아이들이 먼저 밥을 먹고 있었어요. 제자리엔 딸이 앉아 먹고 있었는데, 제게 자리를 비켜주거나 식사하시란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어요. 아들 아이 역시 자기 자리에 앉아 밥만 먹을 뿐, 식사를 하시라거나 늦으셨다란 말 한마디 하지 않았어요.

 

평소 같으면 "어유, 늦었네. 밥 줘~"라며 약간의 너스레를 피웠을텐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기분이 좀 우울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아들 옆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어요. 그런데 속으로 몹시 서운한 생각이 들었어요. '애비 자리를 양보하지도 않고 식사하시라는 말도 하지 않다니, 이건 아닌데….'

 

아버지의 권위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요. 그러면 거기에 걸맞게 변화해야 하는데, 무의식중에 아버지의 권위를 부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런 충동이 일어나면 괴로운 것은 나 뿐이고, 개선될 여지는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지요. 우리 세대가 자라면서 보고 배운 귄위있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그분을 대했던 행동과 습관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일 거예요.

 

사진은 정조의 '시국제입장제생(示菊製入場諸生, 중양절에 열린 과거에 참여했던 수험생들에게)'이란 글이에요. 9월9일 중양절에 성균관에서 정조 자신이 글제를 내려 시험을 치뤘는데 수험생의 성적이 좋지 않아 훈계하는 내용이에요. 읽어 볼까요? 내용이 길으니 단락별로 나눠서 읽어보도록 하죠.

 

① 이등상사생야 독서다문 기비년천사학생 이고왕금래 타백어어제지거 이등증혹문지호 황소게자 비난지자 다사지노망 즉여지치 차소이환급초기 별유이등야(爾等上舍生也 讀書多聞 豈比年淺四學生 而古往今來 拖白於御題之擧 爾等曾或聞之乎 況所揭者 非難知者 多士之魯莾 卽予之耻 此所以還給草記 別諭爾等也)

 

② 상문촉사기야 언인군경수사기 이례솔신공 즉수정공불언 묘당지정 자무불수 어시호기덕지감교지행 이저응어외자 홍곡장장 이민이영가탄미지 유왈 포촉불언 묘당기수 홍곡장장 유민가지 차관자지언야(嘗聞蜀祠器也 言人君敬守祠器 以禮率臣工 則雖靜拱不言 廟堂之政 自無不修 於是乎其德之感敎之行 而著應於外者 鴻鵠鏘鏘 而民以詠歌嘆美之 有曰 抱蜀不言 廟堂旣修 鴻鵠鏘鏘 維民歌之 此管子之言也)

 

③ 여매삼복시언 적인국제 청안기상 신필서하 조지이등여피고루 즉이지불난해지구어 하근이불게시호 과신이등 인위필효 치차불긴수응어작일노심지여 심가탄야(予每三復是言 適因菊製 聽鴈起想 信筆書下 蚤知爾等如彼固陋 則易知不難解之句語 何靳而不揭示乎 過信爾等 認謂必曉 致此不緊酬應於昨日勞心之餘 甚可嘆也)

 

④ 율부제진 우치야심 이과부근체응시 위엄하뢰 행차구차지거 이사체극불성설 한삼일 수기제하제진 소속금일지죄 소설금일지치(律賦製進 尤致夜深 以科賦近體應試 爲掩瑕纇 行此苟且之擧 而事體極不成說 限三日 隨其題下製進 少贖今日之罪 少雪今日之耻)

 

뜻을 알아 볼까요?

 

① 그대들은 상사(생원 진사) 출신의 유생으로 독서를 많이 했으리니 어찌 햇수가 적은 사학 유생들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혹 들어들 보았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제(御題, 임금이 내린 글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백지 답안을 냈다는 말을. 게다가 내준 글제가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대들의 노둔함과 몽매함은 곧 나의 수치로다! 이에 대략 나의 생각을 써서 그대들에게 내리노라.

 

② 듣건대, 촉은 제기라 하였다. (글제에 나온 '포촉불언 홍곡장장(抱蜀不言 鴻鵠鏘鏘)'은) 임금이 제기를 공경스레 지키며 예로써 신하들을 통솔하면 비록 임금이 조용히 팔짱을 끼고 앉아 아무 말 하지 않더라도 조정의 정사가 잘 닦여질 것이며 그러면 그 덕교(德敎)의 감화가 밖으로 크게 드러나 큰 기러기가 높이 날며 큰 소리를 내는 것과 같아 백성들이 이를 찬미할 것이다, 란 말이다. "제기를 안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정사가 닦여지니 큰 기러기 높이 날며 큰 소리 내는 것과 같아 백성이 그 덕을 노래하네"란 말이 있지 않더냐. 이 말은 관자의 말이다.

 

③ 내 매번 이 말을 여러 번 되풀이 음미하다 마침 국제(菊題, 중양절에 치르는 시험)를 맞이해 기러기 울음소리를 듣고 생각이 나 붓 가는대로 써서 내린 것인데, 내 일찍 그대들이 그토록 고루한 줄 알았다면 좀 더 쉬운 글제를 내렸을 것이다. 그대들이 이 글제를 쉬 이해하여 어제 시험볼 때와 같은 노심초사를 겪지 않을 것이라 과신했던 것이 심히 통탄스럽도다.

 

④ 율부(律賦, 장편 산문시)로 지어내라 하면 밤이 더욱 깊어지겠기에 과부(科賦, 과거 시험용 운문)인 근체시로 응시하게 했던 것인데 또 그대들의 하자를 덮어주기 위해 이런 구차한 가르침까지 내리게 됐으니 일이 참으로 말이 아니로다. 내 삼일의 기한을 줄 터이니 글제에 따라 답안을 제출하여 오늘의 죄와 수치를 조금이라도 용서받고 씻을 수 있도록 하라!

 

* 번역은 이완우 씨의 '정조어필과 군신정의'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 부분을 참고 했어요.

 

정조의 장황한 훈계를 짧게 요약하면 이런 말일 거예요. "실망이야~ 다시 해!" 정조의 훈계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전형을 보여줘요. 이 말은 본시 군과 사와 부를 동일한 존중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는 의미이지만, 정조에겐 약간 다른 의미로 적용해야 할 거예요. 임금은 백성의 스승이자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요. 이런 점에서 정조의 훈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그대들의 노둔함과 몽매함은 곧 나의 수치로다!"란 대목이에요. 수험생(자식)의 부족함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전형적인 선생(부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는 아버지의 권위가 살아있던 시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될 거예요. 자식에 대해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 정조의 훈계를 권위와 책임중 권위의 측면으로만 보는 건 단견일 거예요.

 

앞서 아버지의 권위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에 대한 푸념 비슷한 것을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건 푸념할 것이 아니라 되려 고마워해야 할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무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더 이상 자식이나 학생의 잘못을 자신과 동일시할 필요 없고, 그들의 잘못은 그들의 잘못 그 자체로 인식하는 분리 의식을 가져도 무방할 거예요.

 

그렇다면 아버지의 권위가 없는 시대, 아버지의 권위는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죠! 다만 무한 책임을 벗어나는 것 뿐이지, 기르고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있는데 어찌 권위가 필요 없겠어요. 그렇다면 귄위없는 시대의 권위는 어떻게 세워야 할까요? 그건 바로 정기(正己, 자신을 바로함)가 아닌가 싶어요. 자신을 바르게 함으로써 모본을 보일 뿐 책망이나 훈계는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귄위없는 시대의 권위 세우기가 아닐런지요?

 

낯선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爾는 본래 화려한 창틀의 모양을 그린 거예요. 冂은 틀을, 乂은 창살을 그린 거예요. 나머지는 음을 담당해요. 후에 2인칭 대명사로 사용하게 됐는데, 동음을 빌미로 뜻을 가탁한 거예요. 너 이. 爾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爾等(이등, 너희들), 吾與爾(오여이, 나와 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拖는 拕의 속자예요 拕는 扌(손 수)와 它(다를 타)의 합자예요. 끌다란 의미예요.  扌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它는 음을 담당해요. 끌 타. 拖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拖白(타백, 과거 볼 때 답안지를 백지로 내는 일을 이르던 말), 拖帶(타대, 옛 벼슬아치가 웃옷에 띠던, 끌리도록 넉넉하게 만든 큰 띠)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魯는 白(말할 백)과 魚(물고기 어)의 합자예요. 어리석다란 의미예요. 어리석은 이는 그의 말과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白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魚는 음(어→노)을 담당해요. 노둔할 노. 魯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魯鈍(노둔), 魯質(노질, 둔한 자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魯는 나라이름으로도 많이 사용하죠. 나라이름 노.

 

莾은 莽의 속자예요. 莽은 犬(개 견)과 艹(풀 초)의 합자예요. 개가 풀숲 사이로 토끼를 쫓는다란 의미예요. 후일 우거진 풀숲이란 의미로만 쓰이게 되었어요. 우거질 망. 莽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草莽之臣(초망지신,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지내는 사람)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우거지다란 의미에서 연역되어 거칠다란 의미로도 사용해요. 정조의 훈계에서는 이 의미로 사용되었죠. 魯莽(노망, 둔하고 거침).

 

諭는 言(말씀 언)과 兪(마상이 유)의 합자예요. 깨우쳐준다는 의미예요. 言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兪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마상이(통나무 배)가 사람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네주듯, 모르는 것에서 아는 것으로 이동시켜주는 것이 깨우쳐주는 것이란 의미로요. 깨우칠 유. 諭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諭示(유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또는 관에서 백성에게 타일러 가르침), 曉諭(효유, 가르쳐 깨우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祠는 示(神의 약자, 귀신 신)과 司(詞, 말씀 사)의 합자예요. 봄철 신에게 드리는 제사란 의미예요. 示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司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봄철 제사엔 제물은 많이 차리지 않고 기원의 말만 많이 한다는 의미로요. 제사 사.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란 의미로도 사용해요. 사당 사. 祠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祠堂(사당), 祠器(사기, 제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鏘은 金(쇠 금)과 將(장수 장)의 합자예요. 쇠나 옥에서 나는 소리란 의미예요. 金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將은 음을 담당해요. 금옥소리 장. 鏘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鏘(장장, 옥 또는 방울이 울리는 소리), 鏗鏘(갱장, 금옥의 소리. 악기의 소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靳은 革(가죽 혁)과 斤(도끼 근)의 합자예요. 말 가슴에 걸어 안장에 대는 가죽끈이란 의미예요. 革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斤은 음을 담당해요. 가슴걸이 근. 靳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靳靷(근인, 가슴걸이), 笞靳(태근, 매질하여 욕보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아끼다란 의미로도 사용해요. 위 글에서는 이 의미로 사용됐죠. 아낄 근. 靳固(근고, 아껴 숨김).

 

酬는 酉(酒의 약자, 술 주)와 州(고을 주)의 합자예요. 두 번째 술 마시기를 권하다란 의미예요. 酉로 뜻을 표현했어요. 州는 음을 담당해요(주→수). 잔돌릴 수. 원의미에서 뜻을 연역하여 갚는다란 의미로도 사용해요. 갚을 수. 酬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酬唱(수창, 시문을 주고 받음), 酬應(수응, 응대. 술잔을 도로 내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瑕는 王(玉의 변형, 구슬 옥)과 叚(빌 가)의 합자예요. 구슬에 생긴 흠결이란 의미예요. 王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叚는 음(가→하)을 담당해요. 티 하. 瑕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瑕疵(하자), 瑕累(하루, 결점)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纇는 실이 두두룩하게 뭉친 부분이란 의미예요. 糸(실사)로 의미를 표현했고 나머지는 음(뢰)을 담당해요. 마디 뢰. 본의미에서 뜻을 연역하여 흠, 잘못이란 의미로도 사용해요. 마디 뢰. 흠(잘못) 뢰. 纇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纇(하뢰, 흠. 잘못), 結纇(결뢰, 뭉침. 갈등)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贖은 貝(조개 패)와 賣(팔 매)의 합자예요. 물물 교환을 한다는 의미예요. 貝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賣는 음을 담당해요(매→속). 바꿀 속. 본의미에서 뜻을 연역하여 속바치다(금품을 내고 죄를 면함)란 의미로도 사용해요. 지금은 대부분 이 의미로 사용하죠.  속바칠 속. 贖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贖免(속면, 금품을 바치고 죄를 면함), 贖罪(속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그날 점심 때 아이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먹은 것은 권위없는 시대 권위를 지키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어요. 역시 이렇게 말하며 서운해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아유, 아빠가 늦었네(아이들을 향해).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아내를 향해)!"

 

왠지 정조 임금도 지금 되살아 나신다면,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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