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이다. 가슴 설레게 하는 연애 소설.
마지막으로 이런 류의 소설을 읽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없다. 그동안 특별히 재미있지도 않고 비현실을 넘어 초현실주의적이기까지한 소설들에 지쳐있었나 보다. 우연한 만남을 가장한 필연적인 만남. 어쩌면 허황되거나 식상할 수 있는 연애의 소재를 이 소설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에서 찾아냈다.
우리가 살다보면 뜬금없는 문자 메시지를 받을 때가 있다. 엥? 이게 뭐지 하는. 안타깝게도 내가 받았던 황당한 메시지는.. :)
"가스사용료가 1개월치 밀렸습니다."
"가스사용료가 2개월치 밀렸습니다."
"가스사용료가 3개월치 밀렸습니다."
...
그냥 잘못 온 메시지겠거니.. 하다 결국 전화까지 받고 상황을 종료시켰다. 만약 내가 먼저 연락을 취했다면 그런 과히 기분이 좋지 않은 메시지는 바로 끊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 나에게는 이러다 말겠지, 아니면 나랑은 상관없는데 굳이 내가 액션을 취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나마 나는 저정도였지 내가 아는 어떤 분은 건강보험관리공단 전화번호로 잘못 기입되어 있어서 하루에 100통에 가까운 상담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역시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쯧쯧 이러다 말겠지.. ?!
소설의 전개는 굉장히 빠르다. 아주 강렬한 스토리는 아니지만 쉬지 않고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이 소설은 독일의 작가 조피 크라머의 첫번째 소설이다. 출간과 동시에 자국의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한국어를 포함한 7개의 언어로 번역되는 등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작가로 일한 경험이 이 소설을 쓰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역시 사람의 경험은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참 중요하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이 소설의 주인공에 대한 얘기를 조금은 해야할 것 같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의 알 수 없는 죽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괴롭지만 원래의 삶을 되찾고 싶은 클라라. 바람 피우는 여자친구의 모습을 목격한 후 여자를 믿지 못하는 남자 스벤. 그리고 그들의 주변인물들이 있다. 다른 이의 역할은 이 소설에서 그리 크진 않다. 아마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라고 하면 내 생각에는 스벤이 가지고 있는 휴대폰이어야 할 것이다. 아! 스벤의 전화번호라고 해야할까?
클라라의 독백과 스벤의 독백이 번갈아가며 소설을 채운다. 우리는 클라라가 되었다가 또 스벤이 되기도 한다. 전혀 연관이 없을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이 문자 메시지로 연결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독자는 이 소설에 진한 흥미를 느낄 것이다. 때론 내가 스벤이 되어 아, 클라라는 언제 또 메시지를 보내려나, 이번엔 무슨 말을 적었을까. 아, 왜 아직도 메시지를 안 보내는거지? 하는 궁금증을 함께 느끼게 된다. 신기하지 않은가? 현실 속 나는 클라라도 스벤도 아닌데 말이다.
소설의 클라라 파트를 읽을 때는 문체가 굉장히 여성스럽다. 하지만 스벤의 파트에서는 남성적이면서 짓궂기까지하다. 마치 얄미운 남동생을 보는 것도 같다. 두 사람에게서 싹트는 연애의 감정과 밀고 당기기는 이 소설을 놓지 못하게 하는 확실한 묘미이다. 그 연장선에서 나는 이 두 사람에게 나 나름의 조언을 해주고 싶다.
클라라에게
사랑하는 클라라. 벤 뿐만 아니라 누구나 큰 일을 앞두고는 혼란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 벤의 죽음이 네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큰 상처겠지만 그 일을 계기로 너는 너의 길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잖아. 늘 마음에만 품었던 그림도 그리면서 이젠 더 멋진 인생을 살아갈거라 믿어.
하지만 엄마께 그렇게 심하게 따졌던 건 너의 불찰이었던 것 같아. 이 세상 엄마들의 마음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거든. 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아빠가 돌아가신 순간 너희 엄마는 분명 네 걱정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하셨을거야. 오늘이라도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드리렴. 차라리 속상했다고 얘길 하면 엄마는 다 이해하시고 받아주실거야.
사랑의 상처는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가 된대.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나에게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벤이 약간은 무책임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 결혼까지 약속했는데 말이야. 네 앞에는 지금 믿음직한 스벤이라는 남자가 있어. 이제 그와 새롭게 시작하길 바래.
스벤에게
사랑의 상처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단다. 실연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을 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이 들어있겠니. 운이 없어서 그런 사람을 만났던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어쩌면 그녀도 너를 만났던 것이 운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이제 클라라와 행복한 미래를 살기 바래, 진심으로.
클라라는 네가 알다시피 아주 아픈 상처가 있는 여자야. 나도 결혼식 전날 남자친구가 죽어버린 친구를 본 적이 있어. 하얀 웨딩 드레스가 아닌 검은 상복을 입고 하염없이 우는 그 친구를 보면서 세상상을 원망하기도 했지.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웠을거야. 새로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도 겁이 났을테고. 너의 생각보다 여자는 훨씬 복잡한 존재란다.
클라라와 영원히 행복하길 바래. 클라라가 벤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