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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에서 삶을 본다 - 국제시장 노점에서 대한제강으로, 오완수 회장의 인생 이야기
오완수 지음 / 아템포 / 2023년 4월
평점 :
그간 출장을 갈 때마다 열심히 건네고 다녀서인지 벌써 가지고 있던 명함갑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에 조만간 명함을 새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열심히 노력한 끝에 올해 2월 새로운 자격이 하나 추가되었고 나는 이 자격까지 명함에 넣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인쇄소에 명함 제작을 부탁드렸다. 이제 곧 새로운 명함이 나올 것이다.
나는 어제 「철에서 삶을 본다」는 양장본의 단단한 앞 표지를 가만히 열었다. 순간 책의 앞 날개에 적혀있는 저자의 이력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무심한 듯한 그의 인생 이력. 간단해도 너무 간단하다. 고작 명함 하나를 만들면서도 자격을 추가하겠다며 인쇄소에 연락했던 내 자신이 오히려 개미만큼 작아짐을 느꼈다. 평생을 한 회사를 일구며 갖은 고생을 다 한 분의 이력이 이정도만 있으랴. 생각해 보면 구구절절 장황한 글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몸소 모든 것을 보여주었고 앞으로 그의 아들이 그 명맥을 이어나갈테니 말이다.
처음에는 책을 읽으며 고인의 대한제강이 가족기업이라는 점에 조금은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기업이라고 하면 뭔가 불투명한 자금의 출처와 사용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고 '부'를 세습한다는 이미지는 과히 좋게 비춰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에서 그가 밝힌 전세계 100대 기업의 절반에 가까운 기업들이 가족기업이라고 하니 어찌 보면 세상에 나의 가족만큼 나를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가족기업이기에 그 어려운 난관을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었을거란 생각도 든다.
이 책은 해암 오완수 회장이 생전(2012년)에 작성해 놓은 원고이다. 「철에서 삶을 본다」는 그의 아들 오치훈 부사장이 그의 원고를 보관하고 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발간한 책이다. 오치훈 부사장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 오 회장은 당신의 책이 생전에 출간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해 내는 요즘 시대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그 이유가 참으로 궁금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책을 읽으며 가장 처음 내 마음을 두드린 문장은 "튼튼한 쇠도 멈추면 녹이 슨다(p. 17)." 이다. 지금은 녹이 슨 고철을 볼 일이 많지 않지만 가끔 오래된 물건을 보면 철로 된 부속품이 녹이 슬어있는 경우가 있다. 힘 겨루기를 하면 그 어떤 웬만한 금속보다도 강할텐데도 그렇게 쓰지 않고 방치를 하면 철은 붉게 녹이 슬어버리더라. 철은 태어나면서부터 잠시 쉼도 허락되지 않는 금속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오 회장의 삶과도 닮아있다.
책에서는 철강산업의 주축이 되는 두 가지 생산공정을 소개한다. 제강공정과 압연공정이 그것인데 철강에 문외한인 내가 이해하기에 제강공정은 원재료인 고철을 녹여 중간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고 압연공정은 앞서 만들어진 중간재에 열을 가해서 마지막 형태를 갖춘 철근을 만드는 과정이다. 이 두 가지가 대한제강에서 주로 사용하는 공정이라고 한다. 이런 단어들이 생소하긴 하지만 책으로나마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그의 일대기를 담은 이 책은 오직 당신의 피와 땀으로 일군 한 기업의 탄생으로부터 전 성장과정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 나라의 정세와 역사적 배경까지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철'을 빼놓고는 서로간 연결이 되지 않는다. 각 부를 장식하는 제목과 문장들을 보면 그의 삶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제목은 한자어로 되어 있어서 이해가 어렵지만 제목을 하나 하나 풀어서 설명해 주는 문장들은 그저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숙연해짐을 느낀다.
1부 : 원대한 뜻을 품고 긴 여정을 떠나다
2부 : 좋은 쇠는 백 번의 담금질로 만들어진다
3부 : 다시 한층 더 올라가 멀리 내다보고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4부 : 편안히 살고 즐겁게 일한다
그의 일생을 통해 그가 어떻게 철에서 삶을 보게 되었는지 조심 조심 따라가보자. 오 회장은 1939년 10월 경북 의성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라 농사는 추수하는 족족 일본인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도구였다. 아이들이 울면 "순사가 잡아간다"는 말에 울음을 그쳤다고 하니 당시 상황을 겪어보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얼마나 우리 민족을 잔혹하게 대했을지 머리로 이해가 간다. 내가 어렸을 때는 글쎄.. 당연히 순사가 잡아간다는 말은 들을 일이 없었고 호랑이가 잡아간다는 말도 들어본 적은 없다. 아마 무서운 아저씨가 와서 잡아가니 울음을 그치라는 말은 들어본 것도 같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어쩔 수 없이 타향살이를 해야했던 오 회장의 아버지. 당시 7살이었던 오 회장과 바로 아래 동생은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부산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오 회장은 이것이 그들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음을 회고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이 쓰다버린 물건들을 팔아 조금씩 돈을 마련한 오 회장의 아버지는 리어카 하나를 장만한다. 남이 쓰다버린 물건 중에는 미군이 버리고 간 것들이 많았다는데 그 쓰레기들을 하나라도 더 주으려 소소한 다툼까지 일어났을 것을 상상하면 지금 내 삶은 너무나 사치스러움을 느낀다. 고철이 귀했던 그 시대에는 바닥에 떨어져있는 못 하나, 철사 한 줄도 모두 주워서 팔아 돈을 만들었다고 한다. 몇 해 전 집을 이사하면서 나는 수도 없는 못을 버린 것 같다. 이사를 도와주시면서 우리 아빠는 못들을 하나 하나 챙기시는 모습을 보이셨는데 나는 그게 왜 필요한지를 여쭤보았다. 아빠는 언젠가 쓰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우리 시대의 아빠들 역시 절약의 습관이 몸에 켜켜이 베어있다.
오 회장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간간이 콩나물을 길러 팔았다. 나는 물론 생계를 위해서 콩나물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이 콩나물이 얼마나 쑥쑥 잘 자라는지는 알고 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 있던 커다란 콩나물 시루에서 하루가 다르게 마구 자라는 콩나물들을 보면서 좀 무서운 생각도 들었던 거다. 오 회장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생활력이 아주 강한 분들이셨던 것 같다.
오 회장은 어린 시절 조용한 성격이었으나 사업을 하시던 부모님 덕분에 무난한 사회생활을 했다. 부산에 비하면 깡촌에 지나지 않는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오 회장이 대한민국 제 2의 도시인 부산에서 원만한 교우 관계를 보여주었다는 것에서 그의 둥글둥글 모나지 않은 성격을 유추할 수 있다. 한없이 자상했던 오 회장의 아버지는 아들이 원하는 책은 얼마든지 구해주고 학업 성적에도 큰 관심을 보이셨단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오 회장은 학업 성적도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닌지라 당시 콘크리트 건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못과 철사 등을 주로 사용할 수 밖에 없는 판자집들이 즐비했던 부산에서 그의 아버지는 대한상사를 설립하고 납품회사를 인수하게 된다. 비슷한 즈음 설립된 다른 기업들은 이미 부산을 떠났거나 1990년대 말 IMF 경제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은 곳이 많다고 한다. 그런 중에도 현재까지 부산을 지키는 든든한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니 오 회장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역시 저 하늘에서 뿌듯한 마음과 후세대인들에 대한 대견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것 같다.
오 회장이 맞은 인생의 최대 위기는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라고 한다. 아래로 9명의 남자 형제를 둔 그의 양 어깨에 내려앉은 '가족'이라는 짐과 '기업'이라는 또 다른 짐의 무게가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까. 오 회장은 "지금 당장 죽어도 대담해야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절대 피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평생 일궈놓은 기업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그가 해낸 일들을 보면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도 크나큰 귀감이 된다.
「철에서 삶을 본다」를 읽기 전 나는 미셸 오바마의 「자기만의 빛」을 읽었다. 장애가 있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이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가던 길을 가라는 가르침을 주셨다고 한다. 정말 신기한 것은 「철에서 삶을 본다」의 오 회장 역시 동일한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를 하니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패는 빨리 잊어버리고 실패하지 않은 나머지에 몰두하는 것이라는 말씀도 내 안에 울림으로 남았다.
오 회장이 자서전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비단 한 기업을 일궈내는 불굴의 의지만은 아니다. 그는 철에서 삶을 본다는 책의 제목에 걸맞게 성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조건들을 아낌없이 말해준다. 모든 일은 때가 있으며 우리가 자녀들 포함한 다른 이에게 어떻게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는지, 멋지게 나이드는 법 같은 인생 상담자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유한한 우리 인생의 순간 순간에서 그 말씀들을 새기고 따를 수 있기를 바란다. 오 회장이 기업을 운영하며 어려운 순간마다 '삼국지'를 떠올렸듯이 말이다.
어른들이 가끔 사람들이 정신없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켜 '도떼기 시장'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런 시장이 있다는 것은 생각지 못하고 여렴풋이 뭔가 물건을 떼가는 곳인가 라고만 생각했다. 도떼기 시장이 현재 국제시장의 옛말이라니.. 그만큼 유명했던 곳인가 보다.
벌써 몇 해가 지나긴 했지만 부산의 '국제시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개봉한 적이 있었다. 연세가 있으신 어르신들 사이에서 많은 감동과 재미를 전해준 것으로 알고 있는 이 영화를 나도 언젠가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껏 한번 방문해 본 적도 없는 터라 여름 휴가로 부산을 가게 되면 국제시장도 들러보고 싶다.
※ 멋진 인생을 살다가신 오완수 회장의 자서전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큰 감동을 받은 쫑쫑은 개인적인 견해로 이 글을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