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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다니엘 파울 슈레버 지음, 김남시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이라는 제목이 정말 걸맞기는 한걸까?  

보통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하루 하루의 삶에서 느끼는 자그마한 희노애락을 자신있게 토로하는 일도 버겁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친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는 일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술 한잔을 앞에 두고 울며불며 털어놓는 일조차도 쉽지 않은데, 자신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으며 신경병자였음을 밝히는 일은 물론이고 이처럼 그 적나라한 정신궤적을 마치 세밀화 그리듯 토해낸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100년도 넘은 이전의 시기, 막 20세기가 시작되던 1903년에 출간된 다니엘 파울 슈레버의 이 '고백록'은 참으로 적나라한 회상인 것은 물론 처절한 인간내면의 기록이다.  

독일 유수의 도시인 드레스덴 고등법원 판사회의 의장(우리식으로 따지자면 고등법원장)을 역임할 정도로 박학다식했던 뛰어난 지식인, 지성인, 전문가가 두번에 걸친 정신치료소 입원을 거치면서 신이 어떤 음모를 꾸며 자신을 공격 핍박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성으로 만들어 임신시키려 한다고 생각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박증과 과대망상을 겪으며 이를 극복해나가는 참담한 궤적을 한 치의 가감도 없이 그려내고 있다. 

이 '무거운 내용의 저작은' 대단하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뭔가의 깊이와 넓이와 힘과 충격과 계시를 던져준다. 슈레버는 이 고백록에서 자신의 정신이상증세를 피상적으로 살피고 그에 대한 의학적 진단을 하며 헤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다만 묘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철학, 종교, 심리학, 신학, 예술, 문학, 사회심리학, 심지어는 광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은 물론이고 당시의 풍토로는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의 적나라한 외설적 표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지닌 모든 역량과 학식과 교양, 그리고 이해를 총체적으로 구사하면서 자신의 편집증적 증상의 발현과 스스로의 판단을 그려내고자 한다. 

어느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세익스피어를 보는 듯 하고, 또 어느 부분은 도스토예프스키를 보는 듯도 하며. 어느 부분에 이르면 괴테를 만나고, 그러다보면 빅토르 위고의 표현도 나타나고, 발자크의 <인간희극>이 보이는가 하면, 사드와 헨리 밀러도 드러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피카소의 분해되고 재정립된 입체파적 그림이 되기도 하며 어느 치밀한 과학수사기록을 보는 듯도 하고 1만 조각이 넘는 퍼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도 들며 끝내는 정신병동 한가운데서 집단 관찰을 하며 그 무작위의 방언들을 순서도 없이 듣고 기록하는 기분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끝일까? 분명 그렇지 않다. 이 회상록은 그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치밀하고도 이성적 판단과 순서, 설명과 이해로 가득찬 한 편의 비범한 논술이고 분석서이며 비평서라 할 만하다. 인간의 내면에서 쉬임없이 솟아나는 이상하리만큼 복잡미묘한 감정과 욕구와 망상과 허상 등에 대해 집요하리만큼 메스를 들이대며 무한의 분석을 계속하며 그 연원을 찾으려 한다. 그 과정을 허식이나 과장, 거짓이나 조잡한 비유 없이 무서우리만치 있는 그대로 그려나간다. 

왜 이 저작이 이후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문예사조로, 철학이론으로, 심리학 조류로,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다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는 굳이 전문가가 해설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아니다. 이 저작을 인내심을 가지고 찬찬히 읽고 음미하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초현실주의 문학이론에 자동적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쉬르리얼리즘이라는 20세기 초중반의 문학사조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자동기술법'을 굳이 운위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것의 예시를 들지 않더라도 이 회상록은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자신을, 그것도 혼란스럽고 기이한 집착과 강박증세에 시달린 흔적을 이토록 숨김없이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한 마디로 인간의 삶에서 진실과 꿈, 그리고 이성의 힘이 얼마나 강렬한 추동력인지를 보여주는 '무섭고도 감동적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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