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 하나님 자리를 훔치다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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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은 우상 공장인 것을 잘 보여주었다. 우상을 없앤다고 우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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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이 소금통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뒤로 본디오 빌라도와 헤롯과 로마 황제들과 무수한 철학자들과 시인들이 미친 듯이 그것을 다시 주워 담으려 애쓰는 모습은 우스울 정도다. 그러나 이미 소금은 세상에 흩뿌려져 아무리 닦아내려 해도 결코 닦아낼 수 없다.

똑똑히 들었는가? 오직 그런 사람만 남는다. 다른 것은 모두 사라진다. 역사도 끝나고 자연도 무너져 막이 내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세계 역사와 자연보다 크고 지성의 모든 극점과 전체 우주보다도 크다. 그 모두를 합한 것보다 크다. 알겠는가? 비록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시시한 존재일지라도 그 사람은 기뻐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거한다.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마냥 솔깃한 개념으로 쓰라린 인생에 달콤한 설탕을 뿌린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낭만주의로 무서운 죄를 유화시킨다. 천국만 남기고 지옥도 개작하여 없애 버렸다. 유혹과 마귀에 관한 한 그들은 현실을 외면한 채 굳어진 미소로 일관하며, 이미 세상을 다 이긴 척한다.

늘 자연 종교의 꿀 신(神)과 잘 지내는 쪽이 더 쉬웠다. 교회와 교회의 설교에 소금이 있으면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소금은 우리 인간의 환부와 아픈 데를 쏘고 찌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 없는 치유를 원할 뿐더러 아픈 데를 떠올리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래서 세상은 금송아지만 아니라 꿀 신을 달라고 아우성친다.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를 잊고 싶기 때문이다.

소금과 빛에는 공통적인 중요한 속성이 있다. 쓸모 있게 되려면 둘 다 자신을 내주어야 한다. 다른 무언가와 섞여 스스로 희생되어야 한다.

이를 공유하고 책임을 다하려면 당연히 소금통에서 나와야 한다. 소금통은 안정감을 느끼고 좋다. 그곳에는 선한 사람들이 있어 편하고 서로를 이해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전체 음식물 속으로 내보내기가 무척 어렵다. 그들은 세상을 타락의 길로 가게 내버려두면서 어차피 구원을 잃은 세상이라고 자위한다. 그들은 자신이 세상 사람들에게 물들거나 정치 때문에 더럽혀지거나 내면생활에 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한다.

마지막 날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그분은 먼저 모든 소금통을 부수고 모든 말을 뒤집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비참한 실상을 드러내지 않을까 걱정된다. 맛을 잃은 소금과 악취 나는 심지만 모여 있지 않을까 두렵다. 무엇보다 서글픈 것은 가장 종교적이었던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들으며 그분의 약속에 대해 더 많이 알았던 사람들이 이 쓰레기 더미의 가장 큰 부분을 이루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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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김기현 외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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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도 좋았지만...

이렇게 좋은 부자지간이 있을 수 있을까 부러웠다.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질문을 할 수 있는 것도 부럽고 아들에게 인격적으로 답하는 것도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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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악마 사이
헬무트 틸리케 지음, 손성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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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본문으로 그리스도께서 사탄에게 받으시는 세 가지 시험을 색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았고 공감이 되었다.


특히, 악마가 시간과 고통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에서 깊은 공감이 되었다.


또한 추상적인 것으로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시험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험을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으로 언약으로 말씀으로 이기셨다. 그래서 그 이김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고통이 우리를 덮칠 때 우리가 해야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기도"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은혜로 다가왔다.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사용하는 것!


악마는 말씀 밖에서 하나님을 조종하는 자이고 신자는 말씀 아래에서 순종하는 자라는 것! 그래서 우리 또한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 악마가 되느냐 신자가 되느냐...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순간 나는 악마의 수하로 들어가고 악마가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악한 죄인들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고 우리와 형제되기를 주저하지 않으시는 사랑을 베푸셨다. 그것이 복음이다.


Love covers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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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불행이 즉각적인 행동을 부르짖고 있는데 왜 예수님은 굳이 말씀하기를 택하셨을까? 무리는 ‘이분도 결국 이론과 교리를 이야기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론과 교리는 사람을 배부르게 하거나 병을 고쳐줄 수 없고, 시린 뼈를 녹여 주거나 죽은 아들을 살려낼 수도 없으며 두렵고 텅 빈 미래를 채워 줄 수도 없는 데 말이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자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 고생과 불행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복이 있나니, 너희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고도 그들은 오래도록 그것에 매혹되어 헤어나지 못했다.

팔복을 바로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팔복은 고생과 염려에 싸여 있는 우리에게 내미시는 하나님의 손이다. 그 손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려는 목표점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기쁨의 눈물이 날 정도다.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일에 책임을 물으시고 가장 쓰라린 상처도 지적하시지만, 결코 우리의 과거에서 멈추지 않으신다. 그분의 관심은 언제나 우리의 미래에 있다. 우리를 구원할 길을 닦으시고 우리를 그분의 목표점으로 이끄신다.

두 번째 오해는, 예수님의 팔복을 대할 때는 화자이신 그분을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 된다. 감히 팔복을 일반적 인생철학의 경구 혹은 금언으로 평가하거나 자체 내의 진실성을 기준으로 측정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그 모든 발화에서 은밀히 자신을 가리켜 보이신다.

"비참하고 두려운 너희를 복이 있다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단순히 내가 너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삶의 고달픔 때문에 불평하느냐?

그래서 이제 빈손이 오히려 복이 있다. 인간은 모든 희망과 위로를 잃은 지 오래이기 때문에 빈손일 수 밖에 없다. 이제 빈손으로 나온 죄인들이 위로를 받게 된다. 미래에 대한 마지막 한 줄기의 환상마저도 사라진 그들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가 왔다. 빈털터리로 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의 전부이심을 배울 수 있음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손을 잡을 때 그들은 엄청난 인생의 확신을 얻고 불확실한 하루를 기꺼이 맞이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서명하고 인을 친 문서가 있다. 그래서 이제 정처 없이 삶을 방황하는 사람들이 뜻밖의 기쁨에 에워싸인다. 하나님이 늘 곁에 계시며 신기할 정도로 때맞추어 도와주심을 배우기 때문이다.

당신이 복이 있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천국 문을 활짝 열고 당신에게 손을 내미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셔서 "너희는 복이 있나니"라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으며 너희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도성이 없다. 그렇다고 너희가 매번 쫓겨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희가 식당에서 감사 기도를 하거나 일요일 아침에 교회에 갈 때 너희에게 은근히 경멸의 눈초리를 보낼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본격적인 정치 제도를 통해 너희의 신앙을 박해할 것이다. 종말의 때까지 시대마다 반드시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 너희가 나그네임을 확인시켜 줄 것이다."

아무리 오싹한 두려움이 우리를 에워싸도 아무것도 주님의 계획을 꺾을 수 없다. 오히려 고난은 그분의 계획에 정확히 맞아든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누누이 배우듯이 최악의 일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무의미다.

고난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무의미한 고난인 듯싶어 맥이 빠졌던 것이다.

이제 본문의 위로가 좀 더 분명해진다. 고난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지 못하며 주님의 약속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고난까지도 모두 계산하셨다. 고난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가장 심오한 실재다. 고난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광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고난 속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게 된다. 인간이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분은 기뻐하시며 그 고통 속으로 독생자를 보내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벌이지는 일치고 이미 구주의 눈을 거쳐 그분의 심령을 상하게 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다. 이미 오래 전에 그분이 다 보시고 지금도 그분의 심중에 영원히 남아 있다. 알겠는가? 지금 우리 앞에 닥쳐오는 모든 일, 고통과 슬픔이 다 그렇다는 뜻이다.

상이라는 개념은 어떤 행위의 가치를 표현하는 척도이자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는 십자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우리도 다음 두 가지가 동시에 사실이고 계속 공존한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첫째, 자신을 과신하며 세상을 지배하는 불경하고 냉담한 세력이고 둘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왕이신 그분이다.

여기서 하늘이란 하나님의 통치가 절대적으로 완전히 유효한 영역이나 세계를 의미한다.

얼마나 위대하고 큰 상인가! 하나님을 고백할 때 나는 그분 앞에 서서 그분을 변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이 나의 변호인이 되신다. 나는 담대히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다시 말해 고백이란 내 인생의 통치권을 하나님의 손에 넘겨드린다는 뜻이다.

매순간 하늘의 시민이 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상이다. 그러면 하늘의 권능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온다. 연약하고 초라한 내가 하늘이 침투해 들어오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다. 혼신을 다하여 하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이를 위해서라면 고난과 죽음과 남들의 멸시도 감당할 수 있다.

이제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하늘의 진정한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놀란 청중에게 그 임재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통에서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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