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불행이 즉각적인 행동을 부르짖고 있는데 왜 예수님은 굳이 말씀하기를 택하셨을까? 무리는 ‘이분도 결국 이론과 교리를 이야기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론과 교리는 사람을 배부르게 하거나 병을 고쳐줄 수 없고, 시린 뼈를 녹여 주거나 죽은 아들을 살려낼 수도 없으며 두렵고 텅 빈 미래를 채워 줄 수도 없는 데 말이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자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 고생과 불행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복이 있나니, 너희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고도 그들은 오래도록 그것에 매혹되어 헤어나지 못했다.

팔복을 바로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팔복은 고생과 염려에 싸여 있는 우리에게 내미시는 하나님의 손이다. 그 손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려는 목표점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기쁨의 눈물이 날 정도다.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일에 책임을 물으시고 가장 쓰라린 상처도 지적하시지만, 결코 우리의 과거에서 멈추지 않으신다. 그분의 관심은 언제나 우리의 미래에 있다. 우리를 구원할 길을 닦으시고 우리를 그분의 목표점으로 이끄신다.

두 번째 오해는, 예수님의 팔복을 대할 때는 화자이신 그분을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 된다. 감히 팔복을 일반적 인생철학의 경구 혹은 금언으로 평가하거나 자체 내의 진실성을 기준으로 측정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그 모든 발화에서 은밀히 자신을 가리켜 보이신다.

"비참하고 두려운 너희를 복이 있다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단순히 내가 너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삶의 고달픔 때문에 불평하느냐?

그래서 이제 빈손이 오히려 복이 있다. 인간은 모든 희망과 위로를 잃은 지 오래이기 때문에 빈손일 수 밖에 없다. 이제 빈손으로 나온 죄인들이 위로를 받게 된다. 미래에 대한 마지막 한 줄기의 환상마저도 사라진 그들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가 왔다. 빈털터리로 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의 전부이심을 배울 수 있음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손을 잡을 때 그들은 엄청난 인생의 확신을 얻고 불확실한 하루를 기꺼이 맞이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서명하고 인을 친 문서가 있다. 그래서 이제 정처 없이 삶을 방황하는 사람들이 뜻밖의 기쁨에 에워싸인다. 하나님이 늘 곁에 계시며 신기할 정도로 때맞추어 도와주심을 배우기 때문이다.

당신이 복이 있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천국 문을 활짝 열고 당신에게 손을 내미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셔서 "너희는 복이 있나니"라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으며 너희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도성이 없다. 그렇다고 너희가 매번 쫓겨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희가 식당에서 감사 기도를 하거나 일요일 아침에 교회에 갈 때 너희에게 은근히 경멸의 눈초리를 보낼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본격적인 정치 제도를 통해 너희의 신앙을 박해할 것이다. 종말의 때까지 시대마다 반드시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 너희가 나그네임을 확인시켜 줄 것이다."

아무리 오싹한 두려움이 우리를 에워싸도 아무것도 주님의 계획을 꺾을 수 없다. 오히려 고난은 그분의 계획에 정확히 맞아든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누누이 배우듯이 최악의 일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무의미다.

고난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무의미한 고난인 듯싶어 맥이 빠졌던 것이다.

이제 본문의 위로가 좀 더 분명해진다. 고난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지 못하며 주님의 약속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고난까지도 모두 계산하셨다. 고난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가장 심오한 실재다. 고난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광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고난 속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게 된다. 인간이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분은 기뻐하시며 그 고통 속으로 독생자를 보내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벌이지는 일치고 이미 구주의 눈을 거쳐 그분의 심령을 상하게 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다. 이미 오래 전에 그분이 다 보시고 지금도 그분의 심중에 영원히 남아 있다. 알겠는가? 지금 우리 앞에 닥쳐오는 모든 일, 고통과 슬픔이 다 그렇다는 뜻이다.

상이라는 개념은 어떤 행위의 가치를 표현하는 척도이자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는 십자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우리도 다음 두 가지가 동시에 사실이고 계속 공존한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첫째, 자신을 과신하며 세상을 지배하는 불경하고 냉담한 세력이고 둘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왕이신 그분이다.

여기서 하늘이란 하나님의 통치가 절대적으로 완전히 유효한 영역이나 세계를 의미한다.

얼마나 위대하고 큰 상인가! 하나님을 고백할 때 나는 그분 앞에 서서 그분을 변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이 나의 변호인이 되신다. 나는 담대히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다시 말해 고백이란 내 인생의 통치권을 하나님의 손에 넘겨드린다는 뜻이다.

매순간 하늘의 시민이 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상이다. 그러면 하늘의 권능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온다. 연약하고 초라한 내가 하늘이 침투해 들어오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다. 혼신을 다하여 하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이를 위해서라면 고난과 죽음과 남들의 멸시도 감당할 수 있다.

이제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하늘의 진정한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놀란 청중에게 그 임재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통에서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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