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선언들이 익숙한 멜로디로 들리는 것은 '주체'와 '인간'의 동일화,  '능동적 인간'에 대한 찬양이 유행가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많은 부분  근대가 만들어낸 후유증이 틀림없다. 계몽의 시대에 대한 염증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령을 '너 자신을 알리라'로 바뀌도록 했다고나 할까. 그 시작점의 의도에서는 나쁜 맥락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알린다'는 행위를 <상품>과 <광고>로 환원시켜서 주문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해와 편견으로 인한 갈등과 소외를 감소시킬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물론 거기에는 알려야 할 자신의 덕목들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누구든지 알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태어나는 일에 관여할 수 없었듯이, 삶은 의외로 (자신이) 간섭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비록 예측된 일이라 하더라도 그 대응에 있어 무력하기도 하다. 언어와 문화, 구조는 이미 개인의 자유의지의 한계를 설정해 놓았기에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은 (궤도 안에서) 저항하고 분노한다. 자신을 표현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나 표현할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느끼는 수많은 현대 대중들은 이런 까닭에서 '자기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라'는 메시지에 쉽게 경도될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인, 지성인들의 은밀한 충고를 통해 비난_조롱당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 어떤 '실체'가 과연 당신의 실체가 맞느냐고, 동일성과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당신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에게는 경계해야할, 근절해야 할 많은 장막들이 있다. 그런데 때로는 장막과 대안의 경계가 흐려져 보인다.  더 경솔하게 말하자면 대안이 필요한가 말이다. 무엇을 위한 대안을 찾는 것인가.   
 

'블로그' '페이스북' '트워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야 말로 후기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도드라진 변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블로그, 페이스북은 자신의 일기장이자, 1인 미디어로서 사회적 표현이자, 사회적 관계를 통한 힘을 과시할 수 있었던 미시적 정치의 장이자, 소비시장의 활력 매체로 기능하고 있다. 이전 포스트에서 클럽과 같은 동호회(다수,집단) 체제에서 블로그와 같은 1인  체제로 네트워크 지형이 변화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즉문즉답 네트워크적 감수성을 강점으로 하는 트위터에 이르러 그 극에 달했다고 보여진다. 트위터는 집단 체제, 클럽문화의 장점이었던 '연결'이라는 특징을 극대화하면서, 단점일 수 있었던 피로감(운영진, 회원 간의 마찰)을 최소화시켜 주었다. 더불어 블로그의 생산성이 1인에 의지하여야 했다는 점에서 매일 새로운 컨텐츠의 갱신을 요구받는 부담감에서도 해방시켜주었다. 두드러진 잇점은 역시 사용자의 감각을 만족시켜 주었던 즉시성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모든 것을 '네트워크 혁명'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여전히 회의적이다. 트위터, 트위터 이용자가 수용하고 거부하면서 만들어내고 있는 체제가 상당히 모순적이라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이것은 몸의 습속이 자본제적 삶에 적응하여 이질성을 옹호하나, 이성과 감성에 있어서는 여전히 근대적 동질성을 갈망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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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1770년에 태어났다는 점이 믿기지 않아서 다시 확인했지. 베토벤, 나폴레옹하고 동년배라고 하면 어색하잖아. 어쩐지 그 이전이거나 그 이후일거 같아서 말이야. 1770년대는 괴테와 실러의 시대였다며! "문학의 혁신"이 성행하자마자 칸트는 1780년대를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으로 주도했어. 참으로 '계몽의 시대'를 선언하는"거야. 그런 시대에 헤겔의 나이 19세, 맙소사 헤겔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어. 저 유명한 셸링과 같은 방에서 루터파 정통 신학을 공부했다네. 그래 그 해에 프랑스 혁명 소식이 유럽을 들썩이게 했어. 헤겔도 예외가 아니었고. "어느 일요일 아침, 활짝 개인 봄날 아침 몇 명의 친구와 함께 그리 멀지 않은 들판으로 나가 거기에 한 그루의 자유의 나무를 심는" 헤겔에게 낭만주의자라는 말을 건네고 싶어지지. 젊은 세대라는 말에는 낭만의 강도와 방향이 집약되어 있어. 

헤겔과 셸링, 이들은 봉건적 특권의 폐지를 요구하는 프랑스 농민들이 영주의 토지에 자유를 심은 거라고 생각했대. 헤겔의 영웅이 루소였고 자유의 나무를 심는 청년 헤겔을 떠올려봐. 전혀 '보수적 국민국가'주의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 국가 숭배를 이끈 사상가라기 보다는 "자유인을 "기계의 톱니바퀴"로서 취급하는 국가의 사멸을 요구하는" 공화주의자였던거야. 


의지와 자유의 문제는 고민 없이 연동되지 않지. 자유의지가 의지의 자유인가. 의지를 무엇으로 보느냐는 헤겔과 그의 시대에 중요한 윤리였어. 칸트가 Aufklarung을 통해 강조하던 바는 자신의 지성을 행사하라는 것이지. 자기 계몽은 자유의지일까, 의지의 자유일까. 내 방식대로 해석하려고 해. 자동성과 능동성. <헤겔의 영혼론>을 읽고 싶어 찾다가 곤자 다케시의 <헤겔과 그의 시대>를 몇 쪽 읽어보고 있어. 2024년 2월 11일 11시, 너네는 지금 뭘 하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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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4-02-11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셸링은 ˝ <나의 철학 체계의 서술>(1801년 5월)에서 동일철학이라는 새로운 입장을 주창한다. 그것에 따르면 이성은 그로부터 주체적인 것을 사상하면 주체적인 것도 객체적인 것도 아니게 되어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넘어선 ˝완전한 무차별˝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일체의 차이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동일성의 동일성˝이라고 불린다. 이에 반해 현실에서 발견되는 차이는 이성의 외부에 있는 대상˝에 속한다고 설명된다. 그리고 지적 직관으로부터 의식하는 주체를 사상하여 얻어지는 직관적 인식이 ˝사변˝이라고 불리며, 현상의 차이를 인식하는 ˝반성˝의 활동은 사변적 인식으로부터 모두 배제된다.˝(61쪽)
 

햄릿이 말합니다.


같아 보인다구요! 그게 아니라 사실대로인 거지요.

'같아 보인다'는 말은 모릅니다.

어머니, 저를 진실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이 새까만 외투도, 의례적으로 입는 이 검은 상복도 아닙니다.

억지로 우려내는 긴 한숨도 아니요,

넘치는 강물 같은 눈물도 아니요,

낙담한 얼굴 표정도 아닙니다.

그 밖에 슬픔을 드러내는 온갖 모습과 기분과 모양도 아니지요.

이들이야말로 같아 보이는 것들입니다.

누구나 연기 할 수 있는 행동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밖으로는 보여줄 수 없는 내면을 가지고 있으니

이들은 그저 비애의 장신구와 의복일 따름이지요.


햄릿이 진실함과 진실하지 못함을 구별하고 있는 대사입니다. 요즘 저의 심정으로 햄릿의 말을 듣다보면 회오리치며 껴져가는 제 생명을 느낍니다. 진실함이나, 거짓이 있음이나, 존재나, 안과밖이나, 이런 문제들은 힘을 잃었습니다. 앎과 모름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뭘 할 수 있습니까. 뭐라도 있어야 할 곳이 비어 있습니다. 그것이 거짓이거나 허구이거나 장신구이거나 겉치레이더라도, 볼 수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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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회의주의에 대해서

푸코의 주체를 향한 회의주의는 익히 알려진 예속화assujetissement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권력이 만들어낸 주체의 형상을 주체라고 할 수 있겠냐는 지점에서 지적 담론을 유발하게 되었지요. 권력테크놀로지는 개인이 자신을 통제하면서 자기 구축을 행하는데, 만약 시장원리를 따르거나 통치기제를 그대로 복사하려 한다면 예속적인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자기 규율에 따라 통치방식에 저항하고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구축하는 테크놀로지의 활용이라면 주체의 권력테크놀로지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존재방식을 거부하는” 존재자는 개별화하면서 전체화되지 않기 때문에 이중적 억압이 발생하지 않게 된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개인이 해방되려면 우선은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과제를 회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푸코의 회의주의에 정당한 명분이 주어진다면 국가에 결부된, 자본의 작동원리에 종속된, 전체화된 방식에 대한, 돌이킴에서 발생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참 묘하지요. 이것은 누구의 명분일까요. 회의주의자의 관점이란 무엇일까요. 철저하게 부르주아적 지점입니다자기통제의 양식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시길 푸코주의에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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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0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원 2024-02-22 09:2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몰라서 그런거니 너른 맘으로 대해주셔요. 커피 보냅니다.

-보내려고 했으나 복잡하군요. 방법을 익히게 되면 그때 보낼 듯 합니다.
 

다수가 다수성 없이 존재하려면 하나는 하나가 아닌듯 하다. 쿠자누스를 읽다가 부정신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쿠자누스는 신과 인간, 그리고 사물과 우주 ... 모든 존재들을 현실의 차원으로 끌어들이는 철학을 하셨구나. 이제 읽기 시작했으나 2024에 어울린다. 








내 안에서 편의점 음식 잔치가 열리고 있다. 지난 일주일 편의점은 내 전용식당이다. 김밥과 빵과 샌드위치와 도시락들로 아침과 저녁을 챙긴다. 그 중에 으뜸은 도시락이라 비싼 값을 하더라. 김밥은 좀 싱거워도 좋을터인데, 쉐프들이 내 말을 들어줄 리가 없으니, 어허... 다음 주에는 뭐 다른 건 없을려나. 편의점 동지들이여 오늘도 반가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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