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상황 속에 있는 칸트를 읽어보자 하면서도 내내 걸리는 여러 표현들에 마음이 버성긴다. 나의 이 부대낌은 어디에서 연원할까. 칸트는 헤쿠바를 권력에서 내려온 늙고 몰락한 여왕으로 묘사한다. 헤쿠바를 그렇게 읽어야 할까. 특수 형이상학의 역운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비판이라는 한계를 창안하지 않았는가. 계몽의 서곡을 연주하고 있는 칸트는 헤쿠바가 성숙한 판단력을 보여주는 인물일 수 있음을 왜 알아차리지 못할까. 칸트의 은유는 역사 속의 인간을 원인-결과로 묶어버리는 행위에 가깝다. 인간은 자연 법칙에 따른 연관만으로는 설명되지도 않고, 예언적 실마리로도 정리되기 어렵고, 경험적 물음으로도 답해지기 힘겹지 않은가 말이다. 칸트 자신도 역사적 경험을 사건화 하면서 인간은 일종의 창시자라고 했잖은가. 자유라는 소질을 가진 존재자가 현상을 일으키고 난 후에야 만들어지는 산물이 존재자에게 귀속되어야 할 근거가 있을까. 몰락한 형이상학이 그렇듯이 헤쿠바의 추방과 고통도 헤쿠바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할까. 진리는 현상을 사건화하는 권력과 힘의 배후에 있고 명성은 그 증거라고 말할 참일까.
“언뜻 자못 우쭐대고 불손해 보이는 나의 주장에 대해 경멸 섞인 불쾌한 표정을 짓는 독자”가 있을거라 짐작하는 칸트 노인이여, 저를 말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