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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하버드까지 (1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 나의 생존과 용서, 배움에 관한 기록
리즈 머리 지음, 정해영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0월
평점 :
4차 산업혁명에 코로나19의 시대, 요즘처럼 변화가 필요한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변화가 절실한 시간에는 현재 조명의 시작을 과거에서부터 하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접근일 것이다. 잘게 쪼개진 과거의 기쁘고 그러지 못했던 기억들은 현실의 욕망을 적신다. 오늘과 내일, 현실과 이상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과거를 밟지 않고 살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유독 심각한 이에게는 다시는 영원히 도착할 수가 없을 것 같은 공간으로 인도한다. 특히 살갗을 에는 한겨울에 만나는 북서풍 같은 내용 속에 소중한 존재의 기억을 부추기는 이야기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차가움 속의 기억은 배 속이 위산으로 불이 붙은 듯 뜨거워지게 하고 온몸이 떨리게 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한 인간의 과거를 통째로 마주하는 것은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마주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그가 보여 주는 것이 그의 삶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받아들이는 이는 모든 것을 떠오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많은 상상력이 필요치 않다. 오로지 이것을 어떻게 세상에 토해낼 것인지의 문제만이 남는다. 상상하고 아는 것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천지(天地) 차이이기 때문이다.

자서전적 에세이는 대안적인 방법으로 개척하려는 야생의 한 젊은이를 통해 삶의 변화에 대한 우리 정신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다. 설렐 것 같기도 하고 무서울 것 같기도 하는 내용은 제목이나 표지에서 얼추 유추할 수 있다. 2년간 노숙 생활 바닥에서 지금은 한 기업의 CEO 되어 왕성한 사회활동을 할 수 있기까지 인간 승리는 안정된 장소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뉴욕 빈민가 유니버시티 애비뉴의 무능력하기 짝이 없으면서 마약 중독으로 시궁창 냄새를 풍기를 환경에서 탈출한 1980년 9월생의 한 소녀가 자신 꿈을 만들어가는 인생 이야기를 담은 현재 진행형이다. 소설로 치면, ‘발단 – 전개’의 과정만 보여 주었다. ‘위기 – 절정 – 결말’ 부분은 아직 쓰이지 않은 부분이다. 다만 ‘하버드’라는 사회적 이미지가 보여 주는 것에서, 아주 복잡하게 꼬인 부분은 어느 정도 풀린 실타래는 꼬여도 이 정도로 꼬인 부분은 없을 거라 할 수 있기에 해피엔딩(happy ending)의 탄탄대로 꽃길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가 만들어가는 평생의 이야기 전반부에 보여주는 이야기는 태생적, 구축된 가족이 중심에 있다. 인생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모른다(213페이지)는 13살 소녀의 생각은 암시가 되고, 나이는 결코 중요 한 것이 아니다. 변화의 최대의 장애물은 오직 ‘자기 자신’이다.
인생은 한 가지 상황으로만 결정되지 않을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내 삶은 어떤 일이 닥치건 발을 앞으로 내디뎌 전진하려는 나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리라.----489페이지

엄마는 언제나 네 삶 속에 있을 거야(163페이지). 아무리 현재의 삶이 게차반이라고 하더라도 과거의 뿌리는 망각하고서는 현재를 한 걸음도 진척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간은 천륜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모녀지간의 애뜻함은 더 각별한 것 같다. 엄마의 인생을 발목잡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도움이 되는 측면이 더 많았다. 뽕쟁이 엄마와 아빠는 밤마다 코카인을 찾으러 조직폭력배의 구역 그랜드 에비뉴 183번로를 헤맸다. 그러다가 강도를 만나고, 누군가에 맞아서 눈이 까맣게 멍들거나 입술이 찢어진 채로 돌아오곤 했다. 마약상들은 어린 딸의 겨울 코트 같은 온갖 물건을 가지고 와서 마약을 달라고 졸라대는 엄마에게 여자 악마라는 의미로 ‘디아블라’라는 별명까지 붙이고, 마약을 사러 오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초등 1년생 딸의 생일 선물 5달러를 몰래 가져가서 마약을 샀다. 그러다가 결국 엄마는 에이즈에 걸렸다. 그런 엄가에게 ‘엄마’라는 말은 전혀 쓸모없는 말이었다. 13이라는 나이는 감당하기에 너무 적었다. 그래도 ‘사랑’이라는 마음은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함께 하려고 했다. 그때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 말하지 못한 기회의 무게는 두고두고 영원히 마음의 빚으로 남는다.
인생은 무엇을 시도하느냐, 시도하지 않느냐의 문제야(403페이지). 상황이 아무리 좋거나 나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는 현상유지다. 변화를 원한다면 뭔가를 해야 한다. 상황이 절망스러울 때는 더욱 그렇다. 집에서는 하수구 냄새가 났다. 무단결석이 잦았다. 강제로 집을 떠나 아동복지국이 운영하는 집으로 보내지기까지 했다. 양육권이 인도되어 남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선택은 떠돌이 생활을 시작이었지만 집이 아닌 곳은 모두가 지옥이었다. 최악과 최선의 삶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자기 나름의 기준은 있다. 두 살 터울의 언니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생각에 젊음의 객기는 있었으나 시간이 자기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었다. 방법이 현명한 것이라고 보기는 쉽지 않다. 너무나 길게 돌고 돌아서 가는 길이기에 처음에는 박수를 보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현재 이 공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현재의 정체성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엄마의 NA 동전과 10대 때 흑백 사진과 자신의 일기장만으로 충분한 짐을 꾸릴 수가 있을 것이다. 친구 부모님 몰래 그들 집을 전전하며 형설지공(螢雪之功)의 경지에서 더 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본질을 흔들어서 인생의 벽, 세상의 벽을 넘는다. 벽을 넘게 하는 한 가운데에는 육체적, 심리적 유혹의 순간에도 내 안에서 끊임없이 선택할 이유가 있었다. 선택에는 의지보다는 동기부여가 더 크게 작용하였다. 시도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불러 올 것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여태 그런 적이 있었다고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 최악으로 변할 수 있다면, 최선으로 변할 수도 있어(353페이지). 10대 후반의 어린 소녀의 삶은 그들에게서 내가 그동안 알지 못한 어떤 기회가 있을지 궁금했다. 겨우 아홉 살 인생이 주유소에서 하루 동안의 일로 알게 된 인생에 대한 자기반성과 치열한 미래에 대한 꿈은 이미 어른에 가까웠다. 열다섯에 시작된 노숙에서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역시나 먹는 것이다. 굶주림은 어렸을 때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찾아오던 손님이었지만 여전히 반갑지 않았고 익숙하지도 않았다. 그런 공간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함께 할 수 있는 서맨사와 카를로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다. 설득과 울음, 감언이설에 능통하다면 낯선 사람들을 구슬리는 것도 힘이 되어 주었다. 노숙으로 구걸하는 삶은 한심하게 보일지 몰라도, 한편으로는 흥미 있는 모험이며, 또 한편으로는 장애물이 많은 마라톤 경주에 뉴욕타임즈 장학금을 받거나 대학 입학에 있어서 자산이 되었다는 것에서는 허투루 경험은 아니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단 넉 자로 말하기에는 쉽지 않은 굴곡이 있다. 삶은 늘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 같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하는 것 같다. 이미 누군가가 걸었던 길처럼 비슷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다른 길이 연출된다. 누구도 직접 가서 해 보기 전까지는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한순간 모든 것이 이치에 닿다가도 다음 순간 상황이 바뀐다(383페이지). 절망은 알고도 아무도 피하지 못하게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하지만 희망도 이에 만만치 않게 불규칙한 궤적으로 한꺼번에 찾아온다. 마치 운은 그네를 타고 오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제 운이 다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는 삶의 법칙은 걱정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에는 아주 다양한 상황들이 꼬이고 물리면서 만들어진다. 내게 필요한 것들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변수들이 많아졌다. 이 복잡한 인생의 실타래는 배움에서 풀림의 실마리를 주고 있었다.
슬픔에 저항하거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려 슬픔을 감추는 대신 스스로에게 슬픔을 경험하도록 허용하자(487페이지). 슬픈 경험은 현재나 미래 기억에서도 전혀 유쾌하지 않다. 인생의 참여자이자 간접적인 목격자는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그녀의 기억을 따라가면서 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논픽션이기는 하지만 허구로도 꾸며내기 쉽지 않은 이야기 속의 삶은 우리 자신이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노숙이라는 방황은 아슬아슬하다 못해 모든 게 all or nothing의 도박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통념상 허물기 힘들 것 같은 벽을 허물었다는 것은 제3자에게도 유쾌한 간접 경험이 된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그 기억들에 의해 제약되지 않게 새로운 기억으로 채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영웅담은 아니어도 좋은 기억이 될 수 있는 인생의 한 수는 분명히 남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기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