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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평점 :
20년 이상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을 읽었다. 그의 상상력은 갑질쟁이(?)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갑질이다. 상상력을 담고 나타나는 이국적 언어의 번역체는 상상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시리즈로 나타난다. 소설이라는 것 자체가 개연성을 바탕으로 하는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그의 상상력에는 그만의 만행(?)이 있다. 항상 인간을 피조물로 보려는 인간 삶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상상적 공간에서 인간을 객관화, 타자화시키려고 한다. 그 객관화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보게 한다. 여타의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공간 창출 능력에서 만나게 되는 우리, 나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게 하는 것은 나의 속살을 파게 들게 하는 끌림의 그리움을 남기었다. 이번 ‘심판’에도 제목 자체에서 지금까지 만나왔던 그것들을 보여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렇게 그의 두 번째 희곡집 속에서 적나라한 객관적 상관물이 된다.
환생, 긴 시간의 공간이다. 천국의 법정이 열렸다. 재판관, 수호천사이자 변호인, 구형 검사, 전전생에 여자 무용수였고 전생에 판사였던 한 인간 아나톨 피숑이 대화를 만들어 간다. 심판과 환생을 위한 카르마에 대한 무의식의 선택이 있다. 지난 생의 대차 대조표(97페이지), ‘자신의 재능을 망각했는가?’에 대한 심판, 즉 전생에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다. 저자의 인생과 죽음의 철학이 듬푹 담겨 있다. 그리고 여타의 책에서도 그러하듯이 대반전이 막판에 준비되어 있다. 천국에 판사가 환생해야 할 사람과 서로 바꾸어서 환생과 천국의 판사 역할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는 남성과 여성 중 어느 성이 더 나은지에 대한 생물학적, 사회학적인 장점과 단점에 대한 논쟁, 시대를 이해하려면 뭘 해야 하는지도 잠깐의 흥미를 더해 준다.
삶을 요리로 치자면, 유전 25퍼센트, 카르마 25퍼센트, 자유 의지 50퍼센트가 재료로 들어가는 거예요(103페이지). 우리의 삶은 아주 다양한 변수들로 만들어진다. 부모와 무의식과 역정적 선택은 아주 버라이어티하게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로 당장 내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단언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자유의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에는 희망을 품게 한다. 갈수록 변화를 어렵게 하고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만으로 들리던 것에 선택의 갈림길에 도화선이 되어 준다. 연극에 재능이 있었고 좋아했고 전생의 자유의지, 전생의 무의식이었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판사를 선택하였다.
잘하고자 하는 욕심에 비롯된 선택들(142페이지) 결혼, 직업, 직장생활, 자녀 교육 등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선택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로 인한 결과의 책임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삶의 결정에 아무리 자유의지가 중요하더라도, 타인의 자유의지와 충돌하는 경유에는 이익균형보다는 all or nothing의 과잉금지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은 공간에서는 최선의 input이 최선의 output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비록 이런 현실이 명백하더라도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132페이지) ……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인 셈이죠(133페이지). 자신의 재능에 선택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한 범죄이고, 다시 처음부터 반복하는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의 굴레로 들어가야 한다. 선택은 주관적인 인생 분만 아니라 객관적인 운명에도 대가를 치를 각오로 행해져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확실하게 환생을 멈추고 싶으면, 영웅적인 죽음이 최상의 방법이죠(195페이지). 죽음의 방법에 점수를 매긴다. 개인적으로 호상과 악상이 이듯이, 사회적으로도 죽음이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에도 무게가 있고, 저마다의 가치가 다르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불 속으로 뛰어들어 질식사하는 죽음이 그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고통 없는 죽음, 죽음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자다가 죽는 것, 담배를 피워 폐암으로 죽는 것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런 죽음은 환생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다. 환생으로 태어나는 순간에도 죽음의 방법을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죽음에 더 가까운 자리에 있는 순간에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매 순간을 살아가면서 죽음의 자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삶이----두려워요(201페이지). 하지만 존재에게는 죽음도 두려운 것이다. 이 양가감정은 삶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는 말처럼 삶 자체는 좋은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난의 연속을 헤치고 여기까지 오는 데에 들였던 피, 땀, 눈물을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그것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어서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비록 ‘누군가의 입장에서 보면 멍청이야(39페이지)’라고 평가될 수 있어도,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매 순간순간에 온 정성을 들여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기회비용과 매몰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젠 기초 설비가 끝나고 규모의 경제가 가능한 시점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삶이란 건 나란히 놓인 숫자 두 개로 요약(54페이지), 영혼의 진화(90페이지), 삶은 여행의 일부분(92페이지)이라고 아주 짧고 간단하게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종교적이고 고도의 철학적인 개념으로만 다가온다.
여기에 있는 것도 이제 좀 지겹고, 세상을 따라잡을 필요도 있고요(210페이지). 대반전의 순간이다. 주인공 대신에 판사가 환생을 한다. 삶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존재가 이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변화의 열망이다. 그리고 그리움도 빼놓을 수 없다. 삶에서 애간장을 지지고 볶게 만드는 수많은 그 어떤 것은 지만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이 있다. 정체된 현재의 상태이다. 변화가 없는 삶은 권태를 불러오고, 급기야는 현재가 지옥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한다. 변화가 없는 이승의 현재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몇 천 년의 천국 판삿 생활도 다르지 않다. 변화,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로의 길, 미지의 시간이지만 호기심을 채워주는 공간으로의 갈구는 지금 이 순간을 호흡하게 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매 순간에 느끼게 되는 고동치는 심장, 송송히 맺히는 땀, 입안에 고이는 침, 자라나는 머리카락 …… 맛있는 것을 먹고 사랑을 나눌 때의 기쁨, 뛸 때 두 다리에 팽팽히 힘이 들어가는 느낌, 선들선들하는 바람,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 태양, 젊음, 심지어 노화마저도(210페이지) 변화의 공간에서 맞이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가치들이다. 그것이 있기에 두려움이 있어도 꾸역구역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영혼이 너무 비좁은 껍질 속에 갇혀 있게 하지 말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진화하게 내버려 둬야 해요(87페이지). 이 책을 읽고 있는 이는 어떤 삶을 살아 가야 하는 것일까? 분명하게 말한다. 선택이다. 성공적인 삶으로 천국에 남는 것이 최상이지만 환생도 나쁘지는 않다. 길지 않은 희곡집에서 베르나르가 말하는 삶의 방법은 명확하다. 현재 자신의 재능을 썩히지 말고, 죽을 자리까지 생각하는 삶을 살 것이다. 현재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자유의지로 그 선택을 바로 잡을 기회가 있기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 타인을 위한 삶의 길로 나아갈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도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워 폐암으로 죽은 주인공과 그 삶을 평가하는 자리를 빌려서 말하고 있다. 이렇게 수 십 년 동안 만난 그의 책에는 공동체의 긴 역사의 시간, 끊임없이 반복하는 영겁의 시간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보여 주었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의 책을 만나면서, 나 자신이 할 일은 명확해진다. 4차 산업혁명이 한창인 공간에서 변화를 꿈꾸는 자들에게 제격인 상상의 상관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