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지식의 한계 세계관 - 과학적 생각의 탄생, 경쟁, 충돌의 역사
리처드 드위트 지음, 김희주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날마다 능력의 한계에 침전하는 기분이다. 아마 조선의 성군 세종도 명의 달력 대통력과 우리의 농사 현실의 불일치에 침전하는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의 해는 날마다 하늘을 가로지른다. ,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는 우리의 상태나 기분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심지어 과거의 반복적인 현상은 내일의 상황까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한 방향으로만 가고 있다. 이처럼 자연적 사실은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보든지 상관없이 일의적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일상은 항상 그런 사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반면에 우리의 관점은 일의적으로 정의되지 않았다. 시대에 따라 달랐다. 이렇게 우리의 관점이 달랐던 것은 우리의 모든 능력이 다방면으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능력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어떤 특정한 목적 때문에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변한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 지식의 한계이다. 한계는 도전의 단추가 되기도 한다.

 

과학철학의 기본적 쟁점을 통해서 그 역사를 가로지르면서 서구의 그림 퍼즐, 세계관이 직면한 도전을 탐구하고 있다. 그림 퍼즐에는 그 당시에 아무렇게 흘러 다니던 모든 지식과 과학 기술이 하나의 공간에서 총합되어 하나의 번듯하고 체계적인 세계관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세계관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공간을 설명, 예측하고 실재성의 부여에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지가 보인다. 세계관에 배태되어 있는 지식 시계가 보여주는 현재의 그것의 본질을 보기 위해서 기원전 500년 전에서 기원후 1600년경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1600년대에 대 변곡점이 있었고 최근에 다시 상황은 무르 익어가고 있다. 그렇게 아주 오래되고 근본적인 문제의 변신 모양을 찾아간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상식 아닌 상식이 되어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는 것이다. 근본적이라는 것은 아주 개념적이고 철학적이고 복잡하기에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명쾌하게 정답이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기에 항상 미완으로만 남을 수 있는 것이면서도 당시의 기준으로는 일의적인 것이다. 설령 시간이 지나서는 아주 틀린 것으로 밝혀질지라도, 그것이 최선이었고, 그들이 사는 방법이었다. 지금도 이런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

 

복잡성이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흥미롭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266페이지). 우리가 일상으로 만나는 자연현상은 인류가 생존하기 시작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일들이었다. 이런 현상을 인류는 설명하고 예측하고 싶었다. 수많은 경쟁적인 이론과 논쟁, 가설이 태어났다가 사라졌다. 이 일상의 근본적인 것을 예측하고 설명하기 위한 시스템은 시대의 모든 지식을 담고 세대가 지나면서 더하고 빼기를 반복하면서 업그레이드되었다. 오랜 세월동안의 업그레이드는 일반인의 지식으로는 접근하기 쉽지 않게 복잡해지게 되었다. 이제 나름대로의 전제조건과 일상적이지 않은 수단, 용어들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믿는 것에 메스를 가하기 위해서는 더 상위의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하위의 개념을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진리대응론과 진리정합론과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경험적 사실과 철학적/개념적 사실. 확증추론의 귀납법과 반확증추론의 연역법, 콰인-뒤앙 명제와 반증 가능성은 복잡성을 꼭대기로 끌고 가다가 도구주의와 실제론에서 최절정에 이르고, 우주의 목적론과 기계론은 그저 그렇게 들릴 정도다.

 

 

우리가 이론에 바라는 것이 무엇이건, 그 이론은 최소한 관련 데이터를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168페이지)

 

각자 그 시대의 지식을 활용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317페이지). 모든 시대는 그들의 지식수준에 맞는 그림 퍼즐, 세계관이 있다. 현실에 대한 설명과 예측은 지식에 대해서 바라는 비지식인의 최소한의 가치였고, ‘실제는 빼놓을 수 없는 가치였다. 그리고 생활에 있어서 유용성은 하나의 덤이었다. 그들은 서로 맞물리며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말을 유행하게 하고, 때로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말은 기본이 되게도 한다. 보이는 경험적 사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사실에까지 범주를 넓히면서 지식의 한계를 허물어뜨려 왔다. 즉 이 두 명제 너머에는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지식의 정점에 이르게 한다. 그렇게 우리의 선지자들은 항상 우리가 맨눈으로 경험한 사실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철학적/개념적 사실 도출에 몰두했고,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파괴하는 동기가 되었다. 지구는 고정되어 있고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 완벽한 원운동과 등속운동 사실들은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현실의 이해와 설명이라는 상식과 그림 퍼즐에 따라서 믿음과 확신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거기까지만 알았고 거기까지만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사실들이 망원경의 과학기술이나 관성의 법칙 같은 경험적 사실을 통해서 진실이 아니라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험적 사실이 확장되면서, 그것과 철학적 사실의 경계는 계속해서 달라졌다. 지식의 외연이 확장되고 한계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과학도 지금부터 500년 뒤의 기준으로 본다면 원시적으로 보일 것이다(317페이지).

 

하늘은 거의 변하지 않는 완벽한 장소이지만 유일한 절대적 완벽함은 신의 완벽일 것이다(185페이지). 개념적/철학적 사실의 과학적 상상으로도 부족한 부분은 신의 뜻을 찾아내려는 욕구로 채워졌다. 다만 항구적인 우주 힘의 원천으로 여겨졌던 존재는 우주를 설계하고 작동하는 데에서 끝난 존재가 되었다. 우주의 끝은 있다는 것은 기원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끝이 어딘지는 알지 못하였고, 크기가 상상초월의 정도로 커졌다. 신과 우주를 결부하는 경계가 있는 인간의 한계라는 것도 모든 철학적 상상으로 그 끝을 알기 어려웠다. 갈수록 한계의 문을 열고 가는 인간 지식의 한계는 본래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본질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면 한결 수월할 것이지만, 조금 씩 조금 씩 부분적으로만 알아가고 있기에 시행착오가 있다. 그리고 그려가는 그림 퍼즐은 과학기술의 발달, 지식의 양에 따라 달라졌다. 우주가 팽창하는 것처럼 지식도 그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는 그 이전의 그것보다 그랬고, 프톨레나니오스의 그것, 코페르니쿠스의 그것, 현재 우리의 그것은 더 넓어지고 있다. 오히려 지식이 팽창하는 만큼 우주는 팽창하였다로 보는 것이 정확할 할 것이다.

 

철학적/개념적 사실이 명백한 개념적 사실로 변장하기가 아주 쉽다(566페이지). 경험적 사실과 철학적/개념적 사실의 경계는 시대불변으로 고장된 것이 아니다. 상대성 이론은 아무리 분명해 보이는 문제에서 우리가 얼마나 크게 틀릴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사실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시대와 능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천제의 완벽한 원형과 등속운동이라는 사실은 한 때는 경험적 사실로 인정되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또한 절대적 시간과 절대적 공간이 지금은 경험적 사실이지만 영원히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는 장담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망원경, 우주선 등의 과학기술의 발달은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 티코, 케플러 등의 과학의 아버지들도 활용하지 못했던 기술의 편린이다. 맨눈으로만 보였던 사실은 경험적 사실이 되었다. 정치혁명과 산업혁명의 공간에서 새롭게 한계를 만든 기계적 세계관은 상대성이론의 중력과 양자론 해석의 EPR사고실험, 벨의 정리, 아스페 실험, 그리고 진화론과 게임이론의 금자탑 위에서 또 다른 사실에 측면으로 바라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동시대에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이론과 사실들은 서로 다른 기본적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질은 경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민망해 보일 정도이다. 일종의 정보 독과점의 불완전 경쟁 공간을 마치 완전 경쟁처럼 다루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저 변화의 과정에서 일시적인 공존이며, 새로운 공간으로 가는 실마리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멋있어 보인다.

 

움직이는 지구와 양립할 수 있는 새로운 믿음 체계를 정립하려면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들이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에 걸쳐 협력해야 할 것이다(166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뉴턴의 세계관도 완전히 굳어진 일련의 믿음이 아니었다(315페이지). 지식의 일정한 범위를 일컫는 세계관은 한 사람에 의해서, 또는 한 순간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수 세기에 걸쳐서 수많은 과학자들의 피, , 눈물로 하나의 금자탑이 만들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림퍼즐이 하나씩 기각되면서 새로운 세계관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뉴턴의 기계적 세계관은 18세기에 화학, 생물학, 전자기론에서 하나하나의 퍼즐을 맞추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소위 작은 구름이라는 마이컬슨-몰리의 실험과 흑체실험에서 빈틈을 보이기도 했지만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에 의해서 퍼즐의 빈틈이 메꾸어졌다. 진화론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이 기계적 세계관은 이들의 의해서 도구주의와 실재론의 관점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체계가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에 그랬던 것처럼. 지식의 한계는 항상 새로운 경계를 만들면서 동시에 또 다른 경계로 가는 길로 가는 통로로 가는 길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한계는 항상 열려 있는 하나의 출발점이었다.

 

1600년대 초에 이루어진 새로운 발견이 기존 믿음 퍼즐의 변화를 요구했던 것처럼, 최근 수십 년 동안에 이루어진 발견도 우리의 믿음 퍼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28페이지).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는 것은 다시 보이는 것에 최소한의 안도감과 회의를 품으며 맨눈의 지식 현실에서 새로운 변화로 돌아온다. 수천 년 동안 인간 지식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은 실로 인류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데에 하나의 오점도 없다. 그 자부심은 또 다른 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한계를 향해 가고 있다. 4차 산업의 시대의 빅데이터 시대에 인류의 지식은 폭발적으로 한계의 문을 열러 젖히고 있다. 수많은 이론들과 예측 시스템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한계는 존재하고 있다. 설명하지 못하고 예측이 매번 적중하지 못하는 자연과학 현상은 계속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사회현상까지 서로 맞물리면서 지식 속에 묻혀 사는 우리의 삶은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과학의 아버지들의 혼신의 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름의 연속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미궁 속으로만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날마다 무궁무진하게 팽창하는 지식들의 한 가운데에 나 자신의 기분과 능력이 해년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에 무반응하고 있다는 생각에 침전은 비롯되고 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