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말 - 2,000살 넘은 나무가 알려준 지혜
레이첼 서스만 지음, 김승진 옮김 / 윌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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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말’, 나무는 원래 말이 없다.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무의 말을 들으려고 한다. 듣기 원하는 사람은 듣기를 원하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관계이다. 그런데 진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안하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 긍정의 문을 열은 것은 가슴을 문을 닫은 것이다. 덩달아서 ‘the oldest living things in the world’라는 원래 제목에 맞장구를 치면, 진짜 예술가가 예술 감각은 어딘가에 쏙 묻어버리고 과학적으로만 쌈박하게 생각한다는 것에 큰따옴표를 붙이고 싶게 한다. 아무리 그래도 형식보다는 내용에 모든 감각을 담아서 2Hz 이상에 가슴을 열어서 유한한 존재가 시간이라는 것은 엄청 버거운 것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까마득한 시간 속에서 어떤 소리 하나 아까운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생존비법을 적응하여 지금 여기까지 서 있는 존재를 보면, 숨이 턱 막히게 할 것이다. 그것도 평생 가야 비 한 방울 구경하기도 힘든 환경에서 말이다.

 

나무뿐만 아니라 산호, 균류, 박테리아를 포함하여 30종의 생명체를 만난다. 10년의 시간을 공들여서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을 만난다. 45억 살의 지구에 현존하는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최소한 2,000살이 넘는 생명체를 통해서 시간이라는 흐름의 에너지가 생명을 통해서 뿜어내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 맞서는 무언가를 보여 준다. ‘과거라는 시간 감각이 그저 그렇게 얻어지는 차원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과거에 대한 망각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만들어낸 시간에 대한 매혹은 마주 하는 이를 호기심과 용기는 기본으로 하며 생명의 숭고함을 채워준다. 지구라는 생명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살아남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현재를 보고, 과거를 추측하고, 미래를 안타깝게 하는 쳐다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곳에서 과학은 조연이었고 예술적 감성이 featuring되었다. 깊디깊은 과거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린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저지른 훼손을 조금이나마 고칠 여지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39페이지).

 

심원한 시간,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자연의 힘, 그리고 자연의 손아귀에서 생명이 처할 수 있는 위태로움을 말해 주는 풍경.-----(321페이지)

 

과거로, 그리고 전 세계로 가는 여정에 모험의 속성. 어떤 일을 하려고 출발하지만 완전히 다른 일이 벌어진다(218페이지). 미국에서 출발하여 남반구의 남극, 파타고니아, 북반구의 그린란드까지 수천 미터의 고지대에서, 사막을 지나서 심해 바다까지, 온갖 오지를 다닌다. 힘든 등산, 해양 잠수, 혹한의 더위와 추위여행의 과정에서 신체적 위험은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토바고 해안 스페이사이드에서는 불산호에 무릎을 쏘였는데, 얼굴까지 부어올랐다. 그 염증은 몇 달 동안 지속되었다. 스리랑카에서는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손목이 부러지기도 했다. 결국 최소한 2,294살이라는 스리마하 보리수나무 근처에도 못 가보고 말았다. 호주에서는 43,6000살인 로마티아 타스마니카는 당국으로부터 거부되었고 겨우 왕립 식물원에서 번식용으로 재배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이것도 일반인에게는 원칙적으로 공개되지 않는다고 한다. 3,000살의 유칼립투스는 위치와 학명이 비공개로 한다는 조건으로 허용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 자신은 길을 잃지 않으려고 하지만 카메라는 계속 자신을 잃고 헤매어서 아쉬운 순간을 그저 기억으로만 남게 한다.

 

만물의 거대한 체계에 비하면, 인간의 기록이란 얼마나 사소한지. 하지만 엉뚱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된 덕분에 너무 철학적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가 있었다(131페이지). 이들에게 나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라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과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눈으로 보일 수 있게 증명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들의 나이를 정확히 측정하기가 쉽지 않다. 연륜 연대, 비교 연대 측정법, 방사성 탄소 측정법, 지의계측법, 성장률 분석 등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지만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2,000살이 넘는 나무들의 대부분은 중심부분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들로부터 땔감이 되는 것을 벗어나게 했다. 그건 신체적 결함으로 보기보다는 적대적인 극한의 환경에서 세월의 노화를 이겨내는 하나의 생존법이라는 것에 작은따옴표를 하고 싶다. 나무껍질을 발달시키거나 몸통의 대부분을 땅 속으로 이동시키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자신의 나이를 숨기는 것도 자신을 보호하는 비법으로 이었다는 것은 자연의 위대함인지, 인간의 이기적임에 경고인지는 모르겠다. 그런 이기적이 존재가 살아 있는 최고령 생명체를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 매우 운이 좋은 것이다. 바로 옆 사람이 숨을 잃어도 내 숨 찾기에 바쁘게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터무니없이 아름다워서 웃음밖에 안 나오는 때도 있는 법이다(139페이지).

 

극히 험한 환경 여건은 오히려 굉장히 적응성이 강한 생물로 키워낼 수 있다(71페이지). 나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면서 흙과 햇살과 바람과 비에 적응하고 인내한다. 수 천년동안 그렇게 적응할 수 있도록 자신을 변모시켜 왔다. 그런 나무가 장수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는 많다. 최대의 방해불은 역시 시간이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있는 나무는 고독을 넘어서 생명의 무성생식을 통해서 시간을 거슬러서 생명의 꿈을 이어 왔다. 거기에는 가깝게는 가끔 번개, 동물이 있다. 사막 쥐들이 수분 섭취를 위해서 잎을 갉아먹기도 한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에는 인간이 있다. 인간의 불장난으로 사라진 상원의원 나무, 훼손된 나무 반면에 속이 비어 있어서 땔감으로는 효용이 낮아서 살아남았으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바오밥 나무는 화장실이나 술집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관광객들은 기념품 삼아 나무를 떼어 가기도 한다. 꿀버섯(Honey Mushroom)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성장과 번식을 막는 유일한 생물이다(78페이지). 이런 장애를 꿋꿋이 이겨내고 현재 이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존재를 보면, 꼭 사람이 아니라도 존경심이 절로 난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기후변화이다. 시간은 나무의 편이 아니라는 불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무가 견디지 못하고 죽는 데는 이제 추가로 환경 압력이 더 필요한 것 같지도 않아요(98페이지).”

 

고령 생물들은 우리를 심원한 시간에 연결시켜 준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찰나적인 감각, 생각, 감정에 묶여 있고 그것들로 구성돼 있다.-----(198페이지)

 

진정으로 홀로 존재하는 경험(124페이지). 홀로 수만 년을 견디며 자연이 준 힘을 다하여 뿌리와 가지와 잎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았다. 흔히 고독한 존재라고 지칭되는 존재는 겸허해지고 또 겸허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고작 100년을 넘기기도 어려운 존재가 그 고독에 공감한다는 자를 내뱉기도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국립공원도 노령림의 장대함을 보여 주는 흔적을 거의 담고 있지 못했다(145페이지)는 사실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그릇은 너무 왜소해 보인다. 한 자리에 서서 고막을 짓누르고 심장을 쿵쿵 요동치게 하는 고요함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그저 대충으로 어림짐작 하는 것만이 최선일 뿐일 것이다.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불멸인 것은 아니다(111페이지).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환경도 거기에 동참한다. 그 변화에 동참한 인간으로 인해 환경 변화의 속도는 더 빨라진다. 변화의 빨라짐은 나무들이 적응하기 어렵게 할 정도이다. 그렇게 한 번 사라지면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수만 수천 년의 성장의 역사를 하루아침에 날려 버린다. 다시 또 하나의 역사가 그 자리에 있으려면 동일한 시간의 수많은 인간의 방문이 있고서야 가능한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세월이라 시작하기는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생각하기도 버겁다. "1명의 노인이 죽으면 1개의 도서관이 불타 버린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그들의 멸종은 과거의 기념이자 기록이 사라지는 것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도서관을 수많은 자연물 중에 하나라고 치부하는 것은 인간 이기주의의 극치라고 볼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천수(天壽)을 누린 뒤에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나 오로지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불장난을 하거나 자기효용 대로 가지를 쳐 베어가고, 더 나아가 지구를 덥게 하는 것은 기나긴 시간의 역사에 대한 도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의 욕구와 지구의 장기적인 생존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수 있을까?(279페이지) () 수필가가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 고독의 철인(哲人),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賢人)이다고 했던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이기주의로 갈수록 반 자연 친화적으로 변해가는 기후에는 속수무책이다. 백 년도 못사는 한 개의 종이 수천 년을 사는 다른 99.99%의 종에게 생존의 위험을 가하는 것은 너무나 편파적이다. 그 변화에 그렇게 오랫동안 만들어온 비법도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는 것은 불균형적인 생존법이다. 백년이라는 짧은(?) 존재가 내일을 생각한다면, 미래는 과거를 밟고 현재에 행동을 추구하는 조각이라면, 이들이 이어온 생존법은 미래에도 유효한 것이어야 한다. 생존들 사이의 균형은 현재의 인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여기 생존법에서 출발한다. ‘나무를 심기에 가장 좋은 때는 10년 전이고 두 번째로 좋은 때는 오늘이라는 말’(87페이지)도 빈말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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